발표자, 한준석 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대한민국 건국과정은 미국과 투쟁한 이승만의 역사"
  • ▲ 이승만포럼이 열리는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 입구ⓒ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 이승만포럼이 열리는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 입구ⓒ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알리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업적을 연구하는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는 <이승만포럼>이 그 37번째를 맞았다. 자유민주주의, 자유통일, 세계시장을 지향하는 언론사 뉴데일리(주)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하는 제37회 이승만포럼, 지난 20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이날 제37회 이승만포럼은 '이승만의 대미투쟁'이란 주제로 한준석 前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이 발표자로 나섰다. 이날 한준석 전 상임위원은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과정이 미국을 향한 투쟁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박사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의 대통령을 지냈던 프랭클린 D. 루즈밸트와 1945년~53년까지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해리 S. 트루먼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1945년 해방 후 3년간 미군정을 거치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날까지 미국의 정치가와 여론을 흔들어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동력으로 사용한 이승만 박사의 이야기를 한준석 전 상임위원이 이날 제37회 이승만포럼에서 생생하게 들려줬다. 

    "루즈밸트는 한국을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4. 5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신탁통치 아래 둘 수 있다는 말을 1943년 3월 27일에 했었다. 또 1945년 루즈밸트는 처칠, 스탈린과 만나 한국 문제를 소련 정부와도 논의할 수 있다는 내용의 문건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는 미국내 정치 상황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루즈밸트가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의 위험에 빠져 있음에도 이를 묵인하고 대한민국 과도정부를 돕는 국제 통치기구에 소련을 참여시키는 게 좋겠다는 발언도 일삼았다"

       - 한준석 전 상임위원 


    이들 미국의 대통령들(루즈밸트, 트루먼)은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인식 못했을 뿐 아니라 자국의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운명에는 무관심했다. 또 이들은 당시 소련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도 대부분이 확고한 반공산주의 이념이 없었다. 미국은 소련이 일본전에 참전한다면 한국을 점령하는 것에 동의하겠다는 조건도 제시했다. 

  • ▲ 한준석 전 상임위원ⓒ뉴데일리 이미화 기자
    ▲ 한준석 전 상임위원ⓒ뉴데일리 이미화 기자


    약소국이란 강대국끼리 두는 장기판 위의 졸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이 딱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이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우방이라고 말하는 미국은 과거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 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독립운동을 지원하지도 않았다. 미국 정부는 당시 도쿄에 있는 자국의 외교관들의 안전한 귀환에 차질이 생길까 우려했다. 

    "1945년 해방 후 3년간 미군정 아래에 있던 우리는 제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존 R. 하지를 주한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청 사령관으로 만났다. 미군정기간 중 하지는 한국의 이승만과 충돌했다. 

    이유는 미국 국무부의 정책에 따라 대한민국에 좌우합작 정부를 수립하는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좌익들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김구와 김규식은 당시 좌우합작에 찬성하며 하지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 정부에 대해 우려했던 이승만은 UN에 우리나라의 문제를 논의할 것을 요구했고 마침 공산화의 길로 가는 유럽의 많은 국가들을 지켜본 미국이 소련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본격적으로 반공주의 노선을 택하게 됐다"

      - 한준석 전 상임위원


    UN과 미국 여론을 반공주의로 돌리기 위해서 이승만은 고군분투했고 1948년 5월10일 단독정부 수립을 향한 선거를 치른 대한민국은 드디어 1948년 8월15일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 건국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한준석 前 경제과학심의이회의 상임위원은 1930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경제개발계획 작성에 참가해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대통령 경제담당비서관을 역임했다. 한 상임위원은 1971년 하버드대학교 유학 후 제4차 경제개발계획 중 기계·전자부문 계획을 작성하기도 했다. 


  • ▲ 제37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한준석 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이 지난해 출간 책,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 투쟁-1942~1960:편지와 일기, 신문기사로 엮은 건국사의 결정판ⓒ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 제37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선 한준석 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이 지난해 출간 책,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 투쟁-1942~1960:편지와 일기, 신문기사로 엮은 건국사의 결정판ⓒ뉴데일리 윤희성 기자


    한준석 상임위원은 지난해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비서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로버트 T. 올리버가 이승만 대통령과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주고받은 문서를 토대로 작성한 책,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를 번역한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 투쟁-1942~1960:편지와 일기, 신문기사로 엮은 건국사의 결정판>이란 책을 냈다. 

    한 상임위원이 낸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 투쟁-1942~1960:편지와 일기, 신문기사로 엮은 건국사의 결정판>이란 책은 로버트 T. 올리버의 책을 번역한 두 번째 결과물이다. 첫 번째는 통역장교 출신인 박일영씨가 1998년 계명사에서 출판한 '대한민국 건국의 내막'이었다. 박일영씨가 쓴 '대한민국 건국의 내막'은 2008년 동서문화사에서 복간돼 새로운 제목인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로 세상에 다시 등장했다. 이번 한준석 상임위원이 번역한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 투쟁-1942~1960:편지와 일기, 신문기사로 역은 건국사의 결정판>은 비봉출판사에서 편찬했다. 

    로버트 T. 올리버가 작성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는 이승만의 인간됨과 학식에 매료돼 그의 개인비서를 자청하고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운 로버트 T. 올리버가 1942년부터 1960년까지 이승만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주고받은 서신, 전보문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해온 일기를 실은 책이다. 

    올리버 박사(1909.7.7~2000.5.29)

    오레곤주 태생, 2차대전 중 국가 식량 보존처의 전쟁식량부 국장역임.
    시라큐즈대학 펜실베니어대학의 변론과 교수(과장). 본인은 수사학 전공이라 함.
    의사소통협회 회장직 등.

    1942년부터 저서 50궈 이상. 한국에 과한 저서 다수. 이승만 대통령 보좌역으로 한국홍보문서 작성. 이승만 대통령과 기탄없이 의견을 주고받은 가장 친밀한 관계. 

    "이 사람이 올리버 박사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사람들의 화를 돋우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말하도록 도와주고 있지요."

       - 이승만 대통령이 로버트 T. 올리버를 소개하는 말

    모든 영문 관계 서류를 받아쓰고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며 또한 모든 협정, 조약 등을 검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준석 상임위원은 이날 자신이 새롭게 번역한 로버트 T. 올리버의 책,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를 간략하게 소개했다. 

    "1945년 해방 때부터 1960년 4월 이 대통령 하야 때까지 한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미국의 대한 정책과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 이승만의 행적을 기록한 책. 즉 가장 소상한 한국건국과정의 역사기록이다. 서신 일기 등 구체적인 사실로 엮은 한국현대사의 결정판이라고 감히 평해도 좋을 것이다.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세 하에서 한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국정책과 하지 군정사령관과 대립한 과정, 충분한 지식과 정보를 갖고 종합적으로 숙려할 능력이 부족한 김구, 김규식(연립정부수립 추진한 두 사람)을 다독거리면서 막아낸 것. 

    김일성의 남침 저지와 경제부흥을 동시에 이룩하기 위한 노력, 미국 본의 아닌 상호 방위조약 체결로까지 몰아가는 필사적 노력 등을 묘사하고 있음. 그 어려움을 견뎌낸 것을 보면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하늘이 내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도 1954년 방미 때 상하 양원에서 한 연설의 생각 부족 등 그의 실수도 지적하고 있다"

       - 한준석 상임위원 


  • ▲ 한준석 전 상임위원ⓒ뉴데일리 이미화 기자
    ▲ 한준석 전 상임위원ⓒ뉴데일리 이미화 기자

    다음은 발표문 전문이다. 

    제37회 이승만포럼

    한준석(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


    1. 해방 전후의 미국의 대한정책 : 
    해방 전의 미국대통령의 한국인식

    1).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 :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하지 않는 나라

       ① 종전 전의 루즈벨트의 한국신탁통치 발언

    코델 헐이『회고록』(Memoirs)을 출간했다. 그 책에는 1943년 3월 27일, 루즈벨트가 헐에게 시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을 중국과 미국을 포함한 4, 5개 국으로 구성된 국제신탁통치 아래 둘 수 있다”는 것이다. 

    1945년…2월 3일부터 11일까지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의 얄타 회담. 주 의제는 동유럽의 전후처리 계획이었는데, 루즈벨트가 가진 브리핑 페이퍼 중에는 한국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1) 한국의 군사적 점령과, (2) 한국의 과도적 국제 행정기구, 또는 신탁통치의 실시가 결정되면 신탁통치에 참여할 국가의 선정과 관련하여 영국 정부와 중국 정부, 상황에 따라서는 소련 정부 간에 어떤 양해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루즈벨트를 위해 준비한 한국 문제에 대한 토의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으로 결론 맺어져 있다: “극동에서 소련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소련의 태평양 전쟁 개입 여부와는 상관없이 과도적 국제 통치기구에 소련을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 

    2월 8일 저녁, 루즈벨트와 스탈린 두 사람은 단독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루즈벨트는 필요할 경우 영국의 참여를 전제로 미국, 소련, 중국이 공동으로 감독하는 한국 신탁통치위원회의 창설을 제안했다. 루즈벨트는 한국의 신탁통치가 2, 30년 계속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스탈린은 기분이 흡족했다. 스탈린은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부동항을 확보하는 문제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며, “국제 자유무역항을 하나 만드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한 술 더 떠서 루즈벨트에게 영국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신탁통치위원회에 영국도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회담이 끝날 무렵, 중국의 장제스 정부에 공산당도 참여시킴으로써 큰 ‘발전’이 이루어지도록 장제스를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스탈린이 아니라 루즈벨트였다. 소련으로서는 굳이 강조하거나 요구도 할 필요가 없었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원하고 있는 바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회담 내용이 공개된 것은 두 사람 모두가 사망하고 나서 또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② 트루먼도 마찬가지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얄타에서의 비밀협정에서 한국을 소련의 통치 아래 넘겨주겠다고 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소스를 통해 입수한 정보입니다.…”(이승만)

    7월에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은 소련이 대 일본전에 참전한다면 소련의 북한 점령을 즉각 동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일 가운데 많은 사항은 - 상당한 시일이 흐른 뒤에야 알려졌다. 

       ③ 미국의 한국 경시

    전쟁기간 중 당시 다른 대부분의 망명정부에 허용되던 원조인 무기대여법의 원조 대상 국가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이승만의 끈질긴 요청을 거부했다. 

    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면 일본은 그것을 자기들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그로 인해 도쿄에 있는 미국 외교관들의 안전한 귀환에 차질을 빚지나 않을까 하고 미 국무부가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4월 9일, 이 박사는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국무부 관리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들은 대로 한국인을 판단하는 습관이 있어요. 국무부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아직도 어쩔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들이라 여기고 있소. 이런 점이 큰 문제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한국인은 다루기 쉽고, 감정도 없으며, 줏대도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오.…

    국무부의 “소인배 하급 공무원”들은 동양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공급하는 “전문가들”이오. 그리고 그들의 상관들은 그런 잘못된 정보를 토대로 정책을 세우고 있소.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어요? 재앙, 진주만의 그것과 같은 재앙.

       ④ 한국에서 손 뗀다고 하는 정보가 자주 나왔다

    올리버는 약소국이란 강대국끼리 두는 장기판 위의 졸에 지나지 않는다는 표현을 자주한다.  

    중요하지 않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의견이 자주 새어나왔다.

     그 해 가을 <뉴욕타임스>의 군사전문 기자인 핸슨 볼드윈(Hanson Baldwin)과 내가 그의 뉴욕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가 잘 보여준다. 볼드윈은 이 신문의 편집기자인 로버트 오라 스미스와 포스터 헤일리, 한국 특파원 리처드 존스턴 등과 더불어 나의 좋은 친구이자 상담역이었다. 

    그 자리에서 볼드윈은 이번 일과 관련하여 내게 빨리 “이 박사와의 관계를 끊고” 동시에 모든 한국 민족진영 그룹과의 관계에서 손을 떼라고 성화같이 충고했다. 그러면서“미국 정부는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그곳을 소련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내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부언했다: “내 생각이 아니란 말이오. 이건 사실이오. 그런 정책이 기술되어 있는 국방부 문건을 내 눈으로 직접 봤소.”

    48년 5월 14일, 나는 이 박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키플링거 뉴스레터>(Kiplinger Newsletter)지와 데이비드 로렌스의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모두 미국이 한국을 소련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⑤ 종전 후 소련을 과잉배려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

    종전 후에는 유엔의 가동성(可動性) 향상을 위해 소련의 협력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따라서 미국은 소련의 협력을 얻기 위해 필요한 대가라면 무엇이든 치를 생각이었다. 

    한국은 그 형편에 맞지 않게 높은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동유럽 여러 국가의 경우처럼 좌우합작과 신탁통치까지 수락되도록 강요되어야만 했다.

    2). 해방 후의 미군 사령관과 하지의 한국통치

        ① 하지는 전권을 위임받아 뜻대로 통치한 총독

    하지중장은 국무부나 맥아더 장군의 지시를 받지 아니하였다. 오로지 국방부의 지시를 받았으나 국방부는 전시의 점령군 사령관같이 전권을 그에게 위임했다. 

    그가 그의 뜻대로 한 예를 들어보자.

    46년11월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우익정당 후보 31명이 선출되었으며, 12명은 “무소속”이지만, 우익성향을 가진 후보들이 선출되었다. 좌익은 제주도에서 단 2명만이 선출되었다. 김규식이 하지 장군에게 선거가 불공정하게 실시되었다고 주장하자 하지 장군은 김규식의 건의에 따라 서울과 지방 한 곳의 선거 결과를 무효 처리했다. 그러나 재선거에서도 동일한 후보들이 다시 선출되자 하지는 그들이 해방 전 수년간 일본에 부역을 했었다는 사실을 구실로 김성수를 포함하여 3명의 민선 입법의원의 자격을 박탈했다. 

    그는 입법의원이 자기 뜻대로 다룰 수 없음을 알자 김규식에게 추천하게 하여 45명의  선임직 의원을 선출하도록 했다 

       ② 1947년 봄여름 사이에 약3개월 이승만 완전감금 이 사실이 일체 보도 안 되도록 언론 완전 통제 아무도 몰랐다

        ③ 여론조사 왜곡 

    군정은 정기적으로 여론조사를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여러 한국 지도자들에 대한 인기도를 조사했다. 70%의 한국 국민이 이 박사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군정의 뜻과는 배치되기 때문에 그린은 러치 장군의 명에 따라 보고서 내용을 조작해서 이 박사의 지지율을 과반수가 되지 않도록 했다. 

       ④ 건국 후까지 계속된 그의 통치

    48년 7월 23일, 한국에 입국하기 위한 나의 군사 허가증 신청이 하지 장군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통지를 전쟁부로부터 받았다. 상황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즉시 두 번째 신청서를 제출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을 8월 2일자 전문으로 받았다. “정부가 허가 신청을 처리할 때까지 미 군정청 당국은 올리버 박사에게 대기할 것을 통고함.”

        ⑤ 선거 때까지 간 그의 공산당 감싸기

    하지 장군은 처음에 남한에는 정치범이 없다고 선언하였소. 그 후에 전국에 걸쳐서 살인, 방화, 기타 테러 행위로 사형이나 수년의 징역형 선고를 받은 공산당 죄수들을 석방시켰소. 지난해에는 하지 장군이 669명의 그런 죄수들을 사면으로 석방시키더니 이번에는 선거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더 많은 죄수를 석방시켰소. 이번에는 미 군정청이 영장이 없이는 어떠한 사람도 체포하지 말도록 경찰에 명령을 내려 치안과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경찰관들의 손발을 묶어놓았소. 그 결과 테러와 파괴분자들이 자유를 누리도록 크게 고무되어 전국 각지에서 경찰, 유엔의 활동, 선거 본부를 대상으로 정규적인 군사행동을 자행하고 있소. 제주도에서는 매일 정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있소. 

        ⑥ 하지가 김구 김규식을 종용하고 후원한 남북협상 

    떠들썩한 선전과 함께 오래 기다려왔던 회담이 평양에서 4월 19~25일에 개최되고 김구와 김규식이 이끄는 남측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5월 5일에 서울로 귀환하여 김일성(金日成)과 가진 별도 회담에 대해 설명하였다. 김일성은 “결코” 북한만의 단독정부는 수립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문제는 “남북 지도자들이 자주 만나 협상함으로써 성공적으로 해결될 것이고, 국제협력 문제는 외국의 행동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고 확약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북측이 압록강에 위치한 수력발전소로부터의 전력공급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고, 북쪽의 저수지에 저장된 물을 개방하여 남쪽의 논에 물을 대는 데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보장하였다. 회담은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와 이에 뒤따라 한반도 전역에 민족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선거 실시를 요구하기로 결의하고 끝을 맺었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확언이 그 진실성이 밝혀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서 열렸던 정치회담이 이미 국가통일을 위한 바탕을 마련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더 이상의 회담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규식은 북측으로부터의 남한 침공은 없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개인적인 보장을 받았다면서 “이에 대해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구는 평화적 통일과 진정한 국민의 정부 수립이 가능하다고 자신 있게 단언했는데, 그 이유는 “남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공동선언에 서명 날인하고 기록된 바와 같이 틀림없이 계획을 실행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김규식 박사는 너무 똑똑해서 여전히 자신이 소련 사람들보다 한 수 위라고 믿고 있소. 

    그러나 5월 14일, 북쪽으로부터의 전력공급이 차단되었다. 저수지는 결코 남쪽을 향해 개방되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5월 10일 선거 이후의 일이었다.    

    끝 까지 밀은 하지의 김규식 지지, 48년 5월 3일자 <모니터>지에 실린 그의 글. 그것은 “미군정이 김규식을 새 정부의 대통령 후보로 내정” 

       ⑦ 한국인을 어린애 같이 생각한 하지

    (선거 후)하지 장군은 그의 편지 본문에서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 성명으로서 꼭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세 가지 제안”을 제시. 이승만은 그것을 하지가 한국인들을 이래라 저래라 시켜야 할 “어린애들”로 취급하는 또 하나의 예라면서 분개. 

    그 제안은 다음과 같은 것: (1) 국회는 북쪽에서 의원들을 선출할 수 있게 되는 대로 충원되도록 100석의 국회의원 자리를 공석으로 유지하게 결의 (2) 국회는 한국과 미국 및 유엔의 공동 정책인 남북통일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유엔 한국위원회와 협조할 연락위원회를 임명한다. (3) 국회는 “헌법을 채택함에 있어서 한국인의 필요와 심성에 적합하지 않은 경솔한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 

    2. 해방 후의 국내 상황과 이승만의 활동  

    1). 미소 사이에 낀 새우

     한국은 미-소 경쟁의 와중에 꼼짝 못하게 잡혀 있었다. 1946년과 1947년, 이 두 해 동안 한국은 양 강대국의 미래관계가 결정되는 중심점이란 사실이 더욱 확실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이 박사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In the battle of the whales, the shrimp get crushed).”라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는 횟수도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한국은, 이전의 오랜 역사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동북아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야심찬 강대국들의 각축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워싱턴에서 겪었던 고난의 세월은 악화일로에 있는 한국의 상황에 비하면 비교적 평온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2). 적어도 한세대 동안은 친공적이었던 한국민의 정서

    한국 전체가 적어도 완전히 한 세대 동안은 “친공적(親共的)”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1910년 이후, 소련은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생각에는 유일한 친구처럼 보였다. 1903년의 영일(英日)조약 후 미국은 대체로 영국의 노선을 따랐으며, 그로 인해 러시아가 아니고 일본이 극동에서 강대국 중 하나의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925년, 서울에서는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소련은 시베리아로 망명한 한국 애국지사들을 환영하고, 시베리아와 만주의 망명 지사들을 지원했으며, 소련만이 대 일본 한국 게릴라전 및 사보타지 활동을 도와주었다. 

    북한의 경우는 일본이 항복을 하기도 전에 소련의 지령에 따라 중앙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군정을 펴지 않고 대신 한국인들로 구성된 중앙인민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소련의 통제 아래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1946년 2월 9일, 중앙인민위원회는 5명의 상임간부회의가 이끄는 23명으로 구성된 임시인민위원회로 대체되었다. 그 의장은 한국인으로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되어 있었던 김일성으로, 소련군은 그를 북한 인민들에게 공식으로 김 장군으로 소개하였다. 5월에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김일성은 “미래 한국정부의 기본 정책”이란 문서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모든 인민을 위한 자유, 평등, 정의, 번영을 약속하는 20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미군정의 통치 아래에 있던 남한에서도 공산당은 정치 및 선전 활동에 완전한 자유를 허용 받고 있었는데,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북한과의 “통일”에 맞춰져 있었다.  제반 여건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희망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기나긴 불화와 공개적인 갈등의 시간 동안, 이 박사는 굽히지 않는 강인함을 유지해 나가면 결국엔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타협은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에 항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원칙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확신은 그의 평생을 지탱해 준 강철의 보루였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심지어 그의 많은 친구들에게도 이 박사의 그 옹고집은 눈에 띄었다. 또한 그런 완고함은 한국의 정적들이나 미국의 당국자, 국내외 언론들이 이 박사에게 던진 주된 공격거리였다.

    출판예정인 미군정에 관한 가장 면밀한 연구서에서 “국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대체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으며” 그리고 “한반도에서 이 핵심적인 지하 공산주의자 일꾼들이 없는 지역은 거의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일반적인 전술에 따라 신문과 영화관을 장악하는 데 집중했고, 학교를 파고들었으며, 지역의 노동조합 및 농민단체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이 박사는 한국에서 반(反)공산주의 정서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미국 당국자들도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련과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에서 강력한 “용공주의자”들이었다. 머지않은 1950년에 밀어닥친 미국의 반공주의 매카시즘 선풍의 정서와는 극명히 대비되게, 남한의 미군정은 공산당을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했다. 

    1945년 11월 21일, 이 박사는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를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에 하지 장군은 깜짝 놀랐고 큰 충격을 받았다. 

    1945년 12월 29일, 이 박사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신탁통치는 철회되어야만 하며, 모든 한국인은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여야 한다고 선언했다.


    [뉴데일리=윤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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