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회 이승만포럼]
2013. 12. 12(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이승만과 칸트의 영구평화론
김학은(연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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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은 연세대명예교수.
1. 박사학위 논문 요약
이승만의 학위논문 『미국영향하의 중립』은,
첫째, 그의 유치 단계였던 『독립정신』에서 통상 부분을 학문적으로 발전 심화시킨 것이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조선의 실학사상이 강조하는 통상에 선교를 더하여 평화와 접목시켜서 구미사상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한국의 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었다.
둘째, 구미사상 가운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을 계승한 미국의 외교사를 추적하였다. 영국의 무력통상은 식민지 무역에 대한 독점행위이다. 이것은 다른 열강으로 하여금 동일한 무역행위를 유발시킨다. 결국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경쟁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날 것은 명약관화하다.
셋째, 미국의 외교 원리에 어울리는 독립승인의 국제적 조건을 탐구하였다. 미국은 아담 스미스의 자유통상이론을 과감히 받아들여 식민지를 보유하지 않고도 국가의 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지구상에 독립국가의 수가 많을수록 미국에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이 영토의 야심이 없는 근본 이유가 되며 자유통상의 동기가 되었다. 미국이 되도록 많은 수의 독립 국가가 탄생하는데 도와주는 실천 방법이 두 가지였다. 선교와 통상이다. 이승만이 일찍부터 깨달은 방법이다. 이것으로서 이승만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칸트 영구평화사상 이래 그 사상이 만들고 발전시킨 세계역사를 통섭했다.
넷째, 학위논문은 미국의 외교 원리와 일본의 외교 원리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예측하는 안목을 제공한다. 그것은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이다.
이것이 장차 한국 독립운동 방향을 결정하는데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다섯째, 그러나 ‘칸트의 미국’은 언제부터인가 잠들어 있다.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를 써서 미국을 흔들어 깨운다. 그것은 자신의 학위논문의 논리였다.
이에 근거하여 그는 일본의 전쟁야심이 미국의 평화염원과 어떻게 충돌하게 되는지를 자신 있게 추론하였다.
여섯째, 학위논문이 다루는 중립은 칸트 평화의 세 가지 권리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두 개의 권리인 동맹과 보증은 한미방위조약과 한미우호통상해양조약으로 실현되었다. 따라서 중립-보증-동맹의 총체는 필설에 의존한 이승만의 『미국영향하의 중립 1910』-『일본 내막기 1941』-『한미상호방위조약 1953』-『한미우호통상해양조약 1956』으로 구체화되어 그의 정치사상은 완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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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린스턴 대학에서 출판한 이승만 박사학위 논문집 표지.
이승만의 현실감각과 이상은 바로 전쟁과 평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독립회복이라는
칸트 영구평화의 실천을 위한 길고 어려운 도전이었다. 이승만은 한편으로 전쟁과 평화의 현실을 직시하며 다른 한편 칸트 영구평화사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그 실천의 기둥인 국제연합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이 왜 한국문제를 특정국가가 아닌 국제연합으로 가져갔으며 국제연합으로부터 승인을 받으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30년 동안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이원순이 평생 관찰한 끝에 얻은 “유엔[국제연합]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였을 때야 이승만 씨가 국제주의를 종래의 낡은 테두리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던 노력이 결국 이루어졌다.”라는 결론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칸트 사후 150년이 지나 그의 영구평화 이상이 한국에서 실현되는 단초를 보였다는
이승만의 해설이다.
2. 칸트 영구평화론
1729년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이 글라스고우 대학에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담 스미스는 그의 제자이다. 이때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시대이다. 그들은 영국에 대한 패배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영국과는 다른 방향에서 자연 대신 사람으로 연구 방향을 바꾸었고 자연을 수학으로 설명한 것처럼 사회를 설명하는데 시장을 발견한 것이다. 뉴턴에게 만유인력이 우주의 질서인 것처럼 스미스에게 시장원리가 사회의 질서이다.
스미스는 자유주의의 실천이 시장의 영역을 넓히고 소수민족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사람이다. 시장이야말로 소국의 사람도 대국의 사람과 함께 대등하게 평화롭게 살아 갈 수 있는 질서이다. 그 수단이 자유통상이다. 스코틀랜드는 민족 대이동 Diaspora를 통하여 신생 미국에 자신들의 자유통상제도를 적극 전파하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글은 쓰지 못한다. “미국의 독립선언은 특히 중립국의 권리 의무에 궤를 맞추며 국가 간의 평화와 통상의 자유를 증진시키고 국제법 원칙을 발전시키도록 예정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세계에 선포한 것이었다.
한편 우호통상 관해서 가장 통찰력 있는 사상이 칸트의 『영구평화론』이다.
미국 외교사는 칸트 사상의 적용 역사로서 미국의 지도자들은 역사적으로 개별국가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평화연합 a pacific federation(foedus pacificum)’을 추구해왔다. 앞서 말한 대로 윌슨의 국제연맹과 트루먼의 국제연합이 그 예이다.
이렇게 볼 때 통상, 평화, 미국, 권리는 칸트와 이승만의 공통 주제어이다.
이 공통주제가 들어 있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그 자체가 ‘영구평화 조약’으로 전문 아홉 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세 개의 조항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조항 definitive articles이고 나머지 여섯 개의 조항은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금지조항 preliminary articles이다. 의무조항[또는 긍정조항]에서 칸트는 평화를 위해서 확보해야 할 세 가지 ‘권리’와 그것이 보장되는 세 가지 ‘제도’를 들었다.
제1조. “개별 국가의 헌법은 공화제여야 한다.”(공화정) 공화정은 왕국과 달리 국왕이나 소수 귀족의 결정으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국회에서 토의로 결정하므로 그 자체 전쟁 억지력을 갖는다. 이승만은 이것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세상의 절반이 민주주의이고 나머지 반이 전체주의로 있는 한 평화와 안전은 없다.”
제2조. “개별 국가의 법률은 자유국가연합에 기초해야 한다.” (자유국가연합제도). 개별 공화국은 그것이 작든 크든 최소 두 가지 특성에 의해 독립적이다. 여러 가지 가운데 언어와 종교이다. 이것이 확보되려면 어떤 영향력 있는 공화국의 통솔 하에 자유국가연합 a federation of free states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이성 reason의 힘으로 가능하다.
제3조. “세계시민으로서 개인의 권리는 보편적 우호 universal hospitality 조건에 제한된다.”(우호통상제도). 이성만으로는 영구평화에 부족하다고 본 칸트는 영구평화를 보장하는 자연의 장치를 이기심[감성]이 지배하는 시장제도에서 찾았다. 통상이야말로 자연 nature이 보장 guarantee하는 영구평화의 중요한 수단이다.
이승만 역시 개인의 ‘정치적 권리 political right’의 추구에서 출발하였고 그것이 보장되는 '공화국 republic'을 꿈꾸었다. 그리고 칸트가 기대한대로 미국의 통솔 하에 여러 나라와 친구가 되는 국제질서에 주목하였다. 이와 관계하여 그가 학위논문에서 인용한 잭슨 대통령의 글 가운데 다음이 주목된다. “새로운 국가가 독립하여 국가가족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미국이] 승인하는 것은 언제나 대단히 민감하고 책임이 따르는 행위[이다.]”
여기서 국가가족 the family of nations이라는 개념이 칸트가 말하는 자유국가연합 a federation of free states에 해당한다. 미국의 주도하의 자유국가연합이 영구평화를 가져온다는 칸트의 두 번째 의무조항을 이승만은 알고 있었기에 그에 관한 알맞은 문헌을 찾아 인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국가가족”이라는 용어가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에 다시 등장하여 활발하고 중요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사해동포의 권리 cosmopolitan right’를 보장하는 통상이 가져오는 평화의 힘을 믿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라들 간의 이 같은 교류가 계속된다면 각 나라 사람들의 고유한 특성은 사라지고 마침내 온 세계 사람들이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될 것이다. … 더구나 인간의 근본을 생각하면 세계 모든 사람은 형제[사해동포]와 같다.” 그렇다면 전쟁을 멈추려면 어떻게 멈춰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자유국가연합을 형성하여 서로의 상이함을 점차 완화하면 된다.
통상과 평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검토한 이승만은 『미국영향 하에 중립』을 다음과 같이 끝맺을 수 있었다. “[미국의 노력과 영향으로] 교전국의 작전영역은 크게 제한되었고, 전시 중 국가 간의 평화적인 교류수단 peaceful intercourse은 괄목할 정도로 보장되었다. 무엇보다도 중립통상 neutral commerce의 자유가 확대되고 보장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의 학위논문은 통상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칸트의 전통을 따르고 그 구도 속에서 독립의 권리를 학문적으로 찾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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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한성감옥에서 이승만이 쓴 [독립정신]. 대한민국 건국의 청사진이 다 들어있다.
3. 영구평화와 외교
이승만『독립정신』의 세 번째 요지는 외교의 중요성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학위논문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외교독립으로 설정하는데 어떠한 이론적 근거를 찾았는가.
그는 일찍부터 외교독립을 주창하였으니 그의 칠언절구에 잘 나타나 있다. “정치의 급무는 외교에 있고 … 외로우면 나라가 위태롭다오. 圖治先在篤交隣 … 憂國戒存孤立勢.” 1898년 12월 3일 독립협회 토론회에서 이승만은 “신과 의를 튼튼히 지키는 것은 본국을 다스리는 데와 외국을 사귀는데 제일 긴요함”이라는 제목으로 대표 토론을 하였다. 이승만이 외교의 중요성을 처음 경험한 것은 『매일신문』이 한국정부와 결탁한 열강의 이권을 폭로한 데에서 유래한다. 이때의 일을 이승만은 “외국 공영사도 이 무세 無勢한 종이조각을 꺼리기를 군사 몇 만 명보다 어렵게 여기고 …”라며 회고하였다. 이 폭로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이권을 좌절시켰다.
중립통상
자유국가의 자유해상통상을 저해하는 요인은 식민지 이외에 또 하나가 있다. 전쟁이다. 이승만은 제퍼슨의 입을 빌려 말한다. “어느 두 나라가 전쟁을 시작할 때 평화 속에 살기를 원하는 나라들은 … 교전국이든 중립국이든 모든 국가에 대하여 평소처럼 그들의 산업생산물을 교환하기 위해 운송할 자연권을 갖는다. … 요약하자면 타국 간의 전쟁은 이들에 대해서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미국은 비교전[중립]국가로서 전시에도 평시처럼 방해받지 않는 통상을 원했다.
박용만은 미국에서 한국 군단을 편성하여 일본에 대결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미국에 약 5백 명, 멕시코에 약 2백 명의 구한국군 출신이 있었다. 그들을 청년장교로 양성하여 만주와 연해주로 보내어 무장투쟁을 원했다. 실제 박용만의 한인병학교에 대하여 미국 국무장관은 내무부에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의 모범이 되었던 중국의 보황회군대도 뉴욕에서 행진하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 되었었다.
제1차 대전 말기인 1918년 3월 미국의회가 미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모병되어 전쟁에 참여한 뒤 미국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개정한 법률이 태어난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 전에는 귀국이 불가능하였다. 이승만이 어째서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이지 않고 유보적이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소망으로 외교방략만이 남았다. 미국은 여론의 나라이다.
그러나 외교방략의 성공 가능성은 식민주의-제국주의가 심화될수록 커져갔다는 데에 그 역설적 특징이 있다. 이승만이 분석했듯이 유럽에 대한 미국의 국제법 우위와 더불어 강대국 지배민족에 비해 무력에서 크게 열세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약소국 피지배민족의 외교독립방략에 희망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희망은 이승만의 스승 윌슨의 14개조에서 태동되었다.
제1조. 강화조약의 공개와 비밀외교의 폐지. /제2조. 공해상에서 항해의 자유. /제3조. 통상조건의 균등화. /제4조. 군비축소. /제5조-제13조. 식민지 요구의 공정한 조정. 러시아로부터 철병과 스스로 선택한 제도 존중. 벨기에로부터 철병과 주권 존중. 점령되었던 프랑스 영토 해방. 이태리 국경조정.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각 민족 국제적 지위 보장.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에서 철병과 발칸국가들 독립의 국제적 보장. 오스만 제국 주권 보장과 그 치하의 타민족에 대한 자치 육성의 보장. 폴란드 독립. /제14조. 국제연맹 창설.
제1조는 칸트 금지조항 1의 응용이다. 제2조-제3조는 칸트 의무조항 3의 응용이다. 제4조는 칸트 금지조항 3의 응용이다. 제5조-제13조는 칸트 의무조항 1의 응용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의무조항 1과 2를 의무적으로 수행하느냐는 것은 숙제로 남겨졌다. 이 부분을 가리켜 민족자결주의라고 부르는데 특히 제10조에 의해 독립의 열망이 성취된 첫 번째 예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다. 제14조는 칸트 의무조항 2의 응용으로 자유국가연합의 창설이다. 윌슨의 14개조는 칸트의 영구평화헌법의 구체적 실천 조항이다. 윌슨은 칸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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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침공을 예고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이승만의 '일본내막기' 표지와 서평기사.
4.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
이승만 『독립정신』의 네 번째 요지는 국권[국가권리], 곧 이성적 정치제도의 중요성이다. 그 핵심은 민주주의이다. 이승만의 학위논문은 칸트 영구평화의 사례로서 1776년-1872년에 미국의 자유해상통상법제사이다. 학위논문이 다루지 않은 그 후 1882년에서 1940년까지의 세계사를 이승만이 자신의 학위논문의 논리로 설명한 것이『일본 내막기』이다.
이승만이 학위논문에서 결론을 맺었듯이 대서양에서 자유통상의 범위는 커져갔다.
미국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 세계를 자유통상망으로 묶는 것이었다. 그러면 통상=평화가 완성된다. 그러나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통상의 평화적 측면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통상의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에 대한 중재조치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다. 칸트는 자유국가연합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평화적인 해결책으로 별도의 국가중재권을 생각했다. 이에 대항하여 유럽은 군사동맹권을 고집했다. 그 시험대가 조선과 맺은 조미우호통상조약이었다. 1899년 제1차 헤이그 평화 회담에서 국제중재재판제도가 탄생하였다. 국가의 재판권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 병합할 때 조선이 여러 나라와 맺은 통상조약이 걸렸다.
조선이 영국과 맺은 조약은 영일동맹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조미우호통상조약이 문제였다.
미국과 일본은 통상조약과 이민문제를 맞바꾸기로 하였다. 일본의 이민문제는 “신사협정”으로 타협을 보았다. 이것은 일본이 스스로 이민을 억제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불똥은 한국인에게도 튀었다. 미국이민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승만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일본은 있는 힘을 기울여 소위 '신사협정'에 한국인은 천황의 신민이기 때문에 일본 여권 없이는 미국에 입국이 허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구절을 첨가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인은 한국인 학생의 미국 입국의 길을 막아버릴 수가 있었다.
미국은 남진하는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이 필요했다. 그것이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가로 일본의 요구는 식민지 한국이었는데 미국과 맺은 통상조약이 걸림돌이었다. 이것을 폐기해야만 하였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조선이 조약을 이행할 능력이 없어서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에 대하여 이승만은 항의한다.
“미국이 한국을 돕지 않기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은데 대한 변명은 한국 황제는 무력하고, 정부 관리들은 부패와 음모로 만취되고 한국 국민들은 모두 무식하고 태만하다는 이유뿐이었다. … 조선의 황제나 조선조정이 미국 국민들에게 한국 최초의 철도, 최초의 시내전차, 그리고 풍부한 한국의 금광 등의 개발특허와 같은 특권을 주고 양보할 때는 조선 백성들의 무지함을 깨닫는 미국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약속된 바의 원조를 요청받게 되자 한국민의 무지함과 몽매한 것만 들추어냈던 것이다.”
미국은 조미통상조약을 파기하는데 의회 승인을 피할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일련의 협정 체결로 해결하였다. 협정은 조약과 달라서 의회승인이 필요 없다. 그리고 조미우호통상조약의 유효기간이 없었다는 점도 한 몫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추궁한다.
“이 조약은 결코 폐기되지도 않았으며 그 합법성의 여부에 대해서도 의심한 일조차 없었다.”
이승만이 민영환의 밀사로 떠나고 난 후, 헐버트는 민영환에게 조미우호통상조약을 다시 이용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한번 배짱이라도 부려서 미국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는 것이었다. 너무 늦었고 접수되지 않았다. 헐버트는 그 후 상원 외교위원회에 성명서를 제출하였다.
이승만은 폭로한다.
“[미국 외교가에서] 서한을 전달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계획을 돕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계획을 방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어도아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협정을 맺고서 미국은 일본의 한국 점령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소유를 인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의 운명은 모간 공사가 미국 공사로 임명되기 오래 전에 워싱턴에서 이미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을 훈계한다.
“미합중국은 한국을 도와줄 조약상의 책임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일본도 한국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의 보전을 존중함으로써 한일조약에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야 한다. 그들이 의무를 착실히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한미[우호통상]조약을 무시한 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한일조약[에 약속된 독립국가 조항]을 더욱 파괴하도록 조장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무의식 중에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를 휩쓰는 대혼란과 소동의 직접 원인의 하나인 조약위반의 시대를 초래했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조미우호통상조약과 신사협정을 맞바꾸기 위해 1908년에 4개의 협정을 체결한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기고하였다.
“이번에 미 일 양국이 다섯 조건을 협상한데 대하여 세계 정객에 다소간 의론이 없지 아니한 바 혹은 이 협약으로 인하여 미 일 전쟁설이 영[원]히 막혔다고도 하며 혹은 이 협상이 미 일 전쟁을 몇 해 동안 물렸다고도 하니, 그 의견이 다 우리의 보는 바와 대강 같지 아니하도다.” 라고 운을 뗀 이승만은 두 견해가 모두 틀렸던바, 이제 “[양국이 전쟁] 시비를 준비하는 시작이라”고 예측하였다.
그 이유는 “태평양 동서 양편에 두 나라가 서로 일어나매 각각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여 주인 없는 양 해상에 주장이 되고자 함이 실로 자연한 생각이라.” 다시 말하면 태평양 해상에서 미국이 주장하는 자유교역에 역행하는 이 조약이 가져올 결과가 영구평화도 아니요, 임시 미봉책도 아니요, 전쟁준비의 시작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일본 내막기』의 제1장은 일본이 칸트 의무조항 2에 역행하는 모습을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칸트가 지적한 것처럼 단일의 세계정부는 전체주의에 흐를 위험이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일본의 전체주의가 미국의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것은 불 보듯 하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책의 모두에서 미국에 주문하고 있다.
“미국이 서반구[대서양]에서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관련된 세계적인 커다란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 an active, leading part을 담당하여 야만 할 것이다.” ‘칸트의 미국’으로 회귀하라는 주문이다.
이승만은 미국이 정신 차려서 초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사활을 둘러싼 “아마게돈 전쟁”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둘째, 정치적인 이유이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우선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권리’를 지나치게 확대한 것이다. 위험이 닥쳐왔을 때 국방을 견고히 할 동기가 개인에게 결여되게 만든다. 그것은 모든 이해집단 사이의 견제와 균형이 깨젔기 때문이었다. 이 다층적인 균형이 지나친 상업적인 이익 추구로 깨졌다고 이승만은 분석한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이 학위논문에서 소개한 국가가족 the family of nations 이라는 용어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칸트의 a federation of free states 또는 a particular kind of league, which we might call a pacific federation에 해당한다. 국제연맹 the league of nations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칸트가 기대하는 바대로 미국이 통솔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국가연합 또는 국가결합이라는 것은 단지 국가들 덩어리에 불과하여 그러한 오합지졸로는 영구평화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미국은 전체주의 바다 가운데 떠있는 단 하나의 섬”이 되었다.
이것은 일찍이 동양에서 한국이 고립되어 겪은 운명과 같은 것이다.
이승만은 선도국가로서 ‘칸트의 미국’을 일깨운다.
한 마디로 칸트의 세 가지 의무조항을 미국이 지도국가 a center, a focal point로서 통솔력을 발휘하여 실천하라는 주문이다. 미국의 통상에 대한 이기심과 영구평화를 얻기 위한 국제협력을 만족시키는 길은 그 길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에게 패배하게 된다.
이승만은 경고한다.
“세상의 절반이 민주주의이고 나머지 반이 전체주의로 있는 한 평화와 안전은 없다.”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를 마무리 지면서 “나는 이와 같은 정책의 전환을 시종일관 주장해 왔다.”라고 말한다. 그의 「초기 논설」-『독립정신』-『학위논문』-『일본 내막기』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치사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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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29세때 옥중저서 [독립정신]을 현대문으로 요약한 신판 표지.
이승만의 외교독립 주장은 한결 같다.
첫째, 조미우호통상조약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을 계속 추궁한다.
“이 조약들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으며 그 합법성의 여부에 대하여도 의심한 일조차 없었다.”
둘째, 한국의 비극은 그것을 막기 위하여 거중조정을 조약으로 약속한 미국의 배신 이외에 강화도조약에서 선언한 독립국의 지위를 늑탈한 일본의 배신에 있다. 한국은 일본의 영토야욕에 첫 번째 희생자이지만 그로인해 만주와 중국 나아가서 태평양도 내일의 한국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운명은 세계 자유민들의 운명으로부터 …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드디어 미국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오래 동안 태평양을 일본의 호수 또는 일본의 뜰 안이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미국은 “해양의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가상적인 장벽 이면에서 일본 해군의 행동을 인정하는 것이며 미국 시민을 세계 어느 곳에서도 공격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다. 여기서 미일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
넷째, 일본의 신용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런즉 “일본은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한 논증 - 힘의 논증 - 이외에는 인정치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
다섯째, 일본은 그가 개발한 선전-외교-도발-전쟁 공식으로 국가 자살의 전쟁을 시베리아 방면 아니면 태평양 방면에서 일으킬 것이다.
여섯째, 결국에는 민주주의 군대가 일본을 그들의 섬에 잡아넣을 것이다.
일곱째, 지난 반세기에 일어난 이 모든 것이 한국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을 어느 국가에도 예속되지 않는 자유통상지역으로 독립시키지 않는 한 아시아의 평화란 있을 수 없으며 그렇게 되는 경우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