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일 사설 '종교와 정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30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미국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미사를 마친 사제와 신자·시민들은 '공안정권 끝을 알지'라는 팻말을 붙인 십자가를 앞세운 채 '고시 철회, 명박 퇴진'이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사제단은 서울시청 광장에 천막을 친 뒤 농성에 들어가 매일 시국미사를 열겠다고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3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시국기도회를 열고, 4일에는 실천불교승가회와 불교환경연대 등 불교단체들이 중심이 돼 시국법회를 갖는다. '광우병 대책회의'가 주도하는 불법·폭력 시위가 갈수록 시민의 외면을 받기 시작하자 일부 종교인이 '종교행사'로 그 불씨를 되살리려 대신 나서고 있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종교가 본격적으로 시국 문제에 발을 내디딘 것은 10월 유신(維新) 때였다. 국회의원을 잡아다 고문하고,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학원 시위를 막는다고 학교 문을 닫고, 기사 한 줄 한 줄을 검열해 반(反)정부 메시지가 숨어 있다며 인쇄용 동판(銅版)을 압수해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저항의 단어를 담고 있다며 시집(詩集)의 발간을 정지시키고, 일부 소설을 금서로 규정해 추방하고, 문예지와 종합지를 잇달아 폐간시키던 시절이었다. 사회의 숨구멍이 막혀버린 그 시절 종교와 종교인이 나섰다. 종교밖에 나설 곳이 없었고 종교가 나서야 할 때였다.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이름에 아직껏 후광(後光) 비슷한 게 서려 있다면 그것은 국민의 입이 틀어 막혔을 때 그 국민의 입을 대신했었다는 유신시대의 잔광(殘光)이 남아 있는 덕일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국회의원의 입을 봉해 국회를 무력화시켰는가, 학교가 문을 닫았는가. 언론의 입이 강제로 틀어 막혔는가, 시와 소설이 불온하다며 인쇄를 금지시키는가.

    물론 종교도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발언은 때와 장소의 논리에 맞는 발언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 헌법은 국민의 피눈물이 얼룩진 민주항쟁의 산물이다. 종교도 이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한 역할을 해냈다. 그랬던 종교라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빚어진 이 국가적 위기를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행정부는 행정부대로, 사법부는 사법부대로 제 구실을 해 합법적 과정을 통해 하루빨리 수습하라고 촉구해야 마땅한 일이다. 헌정질서 자체가 무너지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간다며 입헌주의와 대의정치의 원리를 지키라고 호소해야 한다.

    일부 종교인들은 비폭력으로 집회를 유도한다는 명분으로 집회를 강행하려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집회 규모가 커지면 아무도 통제할 수 없다. 종교가 그때 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종교가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 지금 상황의 가장 큰 책임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이명박 정부에 있다. 이 정권의 잘못은 백 번 규탄해도 부족할 일이다. 다음 책임은 대의기구 내에서 국민의 뜻을 대변하라고 표를 모아 뽑아준 국민의 위임을 저버리고 지리멸렬해버린 여당과, 국회라는 국민이 마련해 준 무대를 팽개친 채 거리 시위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야당이 져야 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거리시위에서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종교의 세계에선 빛과 어둠, 선과 악이 확연히 갈린다. 그러나 정치는 서로 다른 수백 수천 가지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영역이다. 당장 쇠고기 문제만 해도 국민의 여론은 크게 갈려 있다. 어느 쪽 국민이 선이고, 어느 쪽 국민이 악인가를 누가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지금 여러 종교가 한 가지 구호, 한 가지 목소리를 외치며 정치의 거리로 들어서고 있다. 만에 하나 앞으로 어느 날 이 종교들이 서로 다른 구호 서로 다른 목소리로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내세우며 정치의 울타리로 넘어 들어와 종교끼리 충돌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는가. 종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가 국민끼리 편을 갈라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비극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 곳이 세계에 널려 있다.

    종교인이 복잡한 정치·외교·경제·사회 문제들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다 발을 헛짚게 되면 종교의 권위는 어찌 되겠는가. 종교도 정치에 발언할 수 있고 때로는 해야 할 때도 있다. 지금 종교와 종교인은 대통령과 정당에는 헌법이 정해준 저마다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라고, 국민에겐 감정의 열기를 내리고 국민의 건강을 지키면서도 이 위기가 헌정의 위기로 번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성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종교는 종교의 위치에서 발언할 때 더 큰 의미와 무게를 지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