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요구에 美대통령 트루만 굴복...미군 장성도 언론도 분노
  • 6.25 美영웅들,

    트루만의 휴전명령에 분노!

    "공산당과 협상은 패배!

    더 많은 피 부른다"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주미대사관 문화원장)



    휴전 징비록 <1>:

    외세를 등에 업은 북한의 남침


    오늘의 남북한 비교



  • 인공위성이 지난 해 촬영한 한반도 사진을 살펴보기로 하자!
    휴전선을 경계로
    남쪽은 마치 불난 것처럼 전 지역이 밝고 화려한 빛을 발하는 반면,
    북쪽은 평양에만 희미한 불빛이 보일 뿐
    나머지 지역은 암흑천지다.
    극명하게 대조되는 남북한의 실상을 담은 이 사진을
    글로 풀어서 설명해주는 기사가 있다.

    바로 2013년 4월 8일
    영국의 좌파 성향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이
    [남북한비교](South v North Korea: how do the two countries compare?)
    라는 제목 아래
    보도한 경제지표 등 총 32개 분야 비교가 그것이다.

    <가디언>지는
    북한이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이며,
    한국은 부강하고 세계 최강대국의 지지를 받는 나라이므로
    비교 자체가 쉽지 않고,
    특히 북한의 통계 파악이 어렵다고 전제하면서도
    남북한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비교했다. 



  • 보도에 따르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경우
    한국은 32,400달러(2012년),
    북한은 1,800달러(2011년),
    수출은,
    한국이 5526억 달러,
    북한은 47억 달러,
    수입은,
    한국이 5,142억 달러,
    북한은 40억 달러라고
    나타났다.
    이는 국내총생산에서는
    한국이 북한의 18배,
    무역규모에서는
    127배라는 얘기다.

    인터넷 사용자는
    한국이 인구 1,000명 당 815명,
    북한은 1,000명 당 1명으로
    나타났다.
    기대수명은
    한국이 평균 79세로 69세인 북한보다 10살이 더 길다.
    또한 한국은
    국제사회에 연간 6,900만 달러의 개발비를 지원하는 국가인 반면,
    북한은
    연간 7,800만 달러의 수혜국이다.   

    결론적으로
    <가디언>지는 수치에 나타난 남북한의 극명한 대조에서 보듯이,
    한국은 서구화-산업화된 국가인 반면,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부패하고 가난한 나라라고 보도했다.

    앞서 언급한 사진과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느낌을 가질 것이다.
    경제학자는
    남북한 전력의 차이, 나아가 경제력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도주의자는
    6.25전쟁이 그나마 휴전으로 총성을 멎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고,
    북한주민의 열악한 삶을 동정할 것이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지닌 민족주의자는
    어서 빨리 북한지역에도 밤을 밝히는 불빛이 남쪽처럼 화려해지기를 절실히 기원할 것이다.

    그러나 휴전 60주년을 맞는 올해,
    대한의 국군장병이라면,
    한번 쯤 6.25전쟁 당시를 되돌아보며
    한반도에서 침략자들을 단순히 제 위치로 돌려놓는 것이 아니라,
    침략의 대가를 치르도록 해서 한반도를 통일할 수는 없었을까 하며
    안타까운 감정을 가져봄 직도 하다.

    이러한 감정은 최근 남북한의 정세를 보면 그 절실함이 더해진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전후에
    북한은 대남공세의 수위를 부쩍 높여왔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는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으로 빚어진 주민의 동요를 불식시키고
    단합과 충성을 얻어내기 위한 뻔한 선전책동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경계를 결코 늦출 수 없는 형편이다.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불안한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는 바로 휴전에 있다.
    휴전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국민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휴전을 수용해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짚고 넘어갈 얘기다.


    6.25전쟁과 <징비록>(懲毖錄)의 교훈


    그날의 휴전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책 1권을 소개해야한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남긴
    세계 전쟁문학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저 <징비록(懲毖錄)>이 그것이다.

    [징비]란 스스로 벌을 받아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책은 421년 전,
    왜적의 침략으로 6년 반 동안 나라와 국민이 겪은 더없는 고통을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고자
    양심적인 관리가 피눈물로 쓴 참회록이라고 할 수 있다.


  • 번역본이 여럿 있지만,
    이재호의 <징비록>(1960)은
    원문-훌륭한 한글 번역-그리고 주석이 어우러진 양서라고 할 수 있다.

    상권 279쪽, 하권 746쪽의 방대한 분량 중,
    일반 독자로서는 <징비록>의 본문이자,
    전쟁이 일어난 배경과 전황을 기술한
    상권(279쪽 중 원문과 주석을 빼면 100여 쪽 분량)만 읽더라도
    충분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한다.

    1969년, 전문가들이 <징비록>을 국보로 지정한 이유가 따로 있겠지만,
    필자는 너무도 사실적인 내용,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연역법적인 기술방식,
    그리고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영웅 이순신 장군의 삶이 충실하게 담겼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징비록>에는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대목이 있다.

    바로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빚어지는 민족의 비극이다.

    유성룡은 왜적의 만행은 물론이고,
    명나라 지원병의 횡포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루는 명나라 장수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싸울 수 없다며
    자기네 사령관인 이여송에게 돌아가자고 보고했다.
    이여송은
    나(유성룡),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아래 꿇어앉히고
    군법에 의해서 처리하겠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간곡히 사죄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비통해했다.”


    “임금(선조)이
    청파의 들까지 나와서
    이순신 장군이 머무는 고금도로 가는 명나라 장수 진린을 몸소 전송했다.
    나는 진린의 병사가
    제멋대로 우리 수령을 두들겨 패서 욕보이며,
    심지어 찰방 이상규의 목을 노끈으로 매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땅바닥에 끌고 다니길래
    통역을 시켜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 4세기를 훌쩍 넘은 오늘,
    한반도는 앞서 언급했듯이
    세계 경제 강국인 대한민국,
    세계 최빈국 북한이
    휴전선을 경계로 분단되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에서 풍요롭고 자유롭게 사는 국민 중에
    소련과 중공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은 북한 공산집단이
    한반도 적화를 위해 저지른 반인륜적 6.25전쟁의 책임을
    미국과 대한민국에 전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궤변은
    6.25전쟁 직후부터 북한 김일성 집단-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흑색선전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휴전 징비록 <2>:

    독일 언론이 본 6.25전쟁 발발의 책임


    북한 공산집단의 6.25전쟁 도발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이외에 가장 경악했던 국민은 서독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처럼 국토가 분단되었던 독일의 유력지들이
    6.25 발발 직후 보도한 사설은
    전쟁의 발발 원인과 침략자에 관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 한국전쟁 발발 3일후인 1950.6.28일 [International News Photos]가 배포한 사진.
    [INP] 통신사는 1948년 10월 도쿄에서 촬영된 이 사진을 통해서

    6.25전쟁의 침략자가 누구며 피해자가 누군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결연한 표정의 액아더 장군과 수심에 가득 찬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 “아시아에서의 전쟁”

    <디 벨트>: 독일의 대표적 보수 성향 일간지,
    1950.6.26일, 아달베르트 볼리첵(편집국장) 기명 사설

    공산주의자들이 소위 [평화캠페인]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유포시켜왔으며,
    오늘도 유포시키고 있는 허튼 소리가 무엇인지를 몰랐던 사람들은
    몇 시간 전에 발발한 사건을 보고 대오각성해야만 한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한국을 침공했다!
    침략자는 북한이다.
    북한은 한반도 대립관계를 평화적으로 해결해볼 노력은 하지 않고,
    전쟁이란 수단의 사용도 서슴치 않았다.

    일본의 강점 하에 있던 한반도는
    1945년 연합국의 승전으로 남북한으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통일이라는 신질서를 마련하기 위한 국제적인 전제조건들이 이미 만들어졌었다.
    즉, 미소 점령군들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후에
    자유로운 총선에 의해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되지 못했고,
    북한은 탱크와 전투기를 대한민국으로 내몰았다.
    이번 침략은 공산주의자들이 항상 써먹는 방법대로
    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동서독에서 점령군이 철수하면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등골이 오싹한 사건이다.

    한반도 침략전쟁은 국제법상 범죄행위다.
    이런 범죄행위의 문제해결에 걱정거리가 하나있다.
    침략자들을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쫓아버릴 뿐만 아니라,
    응분의 벌을 내릴 수 있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현재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기능이 마비되었는데,
    이번에는 실효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 "기습공격"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독일 최고 일간지,
    1950.6.26일, 파울 제터(발행인 겸 편집국장) 기명 사설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한 1945년 5월 8일,
    이제 전쟁이 끝났구나하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은
    오늘부터 또 다시 쓰라린 체험을 맛보아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간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1년 반 전,
    소련은 북한에서 점령군을 철수시키며,
    북한인이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전 세계에 강력한 선전공세를 폈다.
    이는 북한에서 소련의 지위가 확고해졌으므로
    대한민국에서 미군의 철수를 유인하는 기만전술이었지만,
    도덕적인 압력을 받은 미국은 군대를 곧 철수시키고 말았다.

    그간 양국 점령군의 철수 이후 남북한의 분쟁은 그치지 않았다.
    지난 몇 주간 지엽적인 분쟁들은 더욱 격렬해졌고, 횟수도 늘었다.
    그리고 이제 북한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침을 강행하고,
    한국 해안으로 상륙함으로써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북한 정권은 이번 침략이 적의 적대행위 때문에 빚어진 것이므로
    사태의 책임은 적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에 따른 군사행동,
    한반도 정세에 맞는 막강한 병력 투입,
    수주일간 준비가 필요한 상륙작전,
    사전 예고 없는 기습공격,
    선전포고와 동시에 개시된 적대행위 등

    이번 사태의 전모는 누가 침략자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한반도에서의 시험전쟁"


    <디 짜이트>: 독일 최고의 주간신문,
    1950.6.29일, 리하르트 튕겔(편집국장) 기명 사설

    소련의 한반도 침공개시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이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미국인 스스로도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미국정부 관리와 정치인들은
    1950년 6월 10일 소련의 프라우다지가 보도한
    다음과 같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성명을 의혹의 눈초리로 읽었어야만 했다.


    “조선인민은
    조국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다가오는 조선해방 5주년을 영광스럽게 맞이하고,
    조선민족 모두가 하나의 통일된 민주국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을 경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반드시 성취돼야 할 것이며,
    우리는 유엔한국위원회가 조선통일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익히 체험했던 사람들은
    그의 선생님 격인 크렘린의 독재자 지배하에 있는
    북한 전체주의 정권이 구사한 이 같은 언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간파했어야 했다.

    그러나 성명 발표 10일 후
    트루먼 대통령의 외교고문 덜레스는
    한국 국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에서 세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미국인들은 한국의 안보는 도외시하고,
    한국의 민주주의 가치 함양, 생활수준 향상과 같은 인기영합 정책에 매달렸다.


    자유세계는
    한국전쟁에서 최후까지 저항한다는 단호한 결의를 하지 않으면,
    향후 소련의 지속적인 공격에 대해서 어찌 해볼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 전쟁에서 기필코 승리해야한다.
    강력한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말이다.




  • "가련한 침략자"


    <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독일의 대표적 진보 성향 신문.
    1950.7.3일, 칼 게롤트(발행인 겸 편집국장) 기명 사설

    북한의 한국 기습 침공 직후,
    서독 내 공산계 신문들은 일시 당황하다가,
    이틀 후부터 해괴망측하고 근거 없는 공산당 선전 문구를 분주히 옮기기 시작했다.

    “북한은 침공한 것이 아니라, 침략을 당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1939~43년간 나치 정권과 공모해 폴란드를 분할했던 방법을
    지금 한반도에서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련 외무차관은
    미국이 평화의 적이요 전쟁수행자이며,
    한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을 준비해왔고
    미국의 지원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작전을 펼쳤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니, 한국이 그렇게도 잘 준비했었기에
    지난주 북한군의 침략으로 수도 서울을 잃었단 말인가?


    한국 전쟁은 서방세계의 구심점이 되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정치적인 차이를 초월해서
    불안 없이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고자하는
    전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사다.


    영국 외무장관은
    소련 외무차관의 발표를 비난하고,
    유엔안보리 결정에 따라 군대를 파병할 의사가 있다고 선언했다.
    유엔한국위원회는
    북한이 침략한 것이지 한국이 공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했다.
    소련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데 노력하기 바란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제 몫을 전부 차지하지 않았는가?



    휴전 징비록 <3>: 승리 의지의 퇴색


    종군기자 오에치피 킹


    6.25전쟁 발발 후 초기의 몇 개월간 많은 고통이 따랐지만
    침략의 희생자인 우리는 참을 만했다.
    미국과 그 밖의 자유세계가
    우리와 힘을 합쳐 침략자들을 궤멸시키고 응징할 때가 오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는 3개월 후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실현가능하게 돼 희망이 고조됐다.



  •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0년이 암울하게 저물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패배시킬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됐음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이는 침략자를 기필코 응징하겠다는
    미 정책 당국의 승리 의지가 퇴색했기 때문이다.

    1951년 4월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을 전격 소환한 것은
    그런 의지 퇴색의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같이 나약한 미국정부의 태도를 강력하게 비난한 미국인이 있었다.
    바로 종군기자 오에치피 킹(O.H.P. King, 1902~1996)이었다.

    고향인 미국 포모나의 지방지에서 20년을 근무한 킹은
    1945년 AP통신사에 입사했으며,
    1948년에는 46세의 나이로
    꿈의 직장인 AP통신 도쿄 특파원이라는 보직을 받았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한국에는 3명의 외국특파원이 주재하고 있었는데,
    AP통신의 킹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 그는 종군기자로서
    휴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을 생생하게 목격한 증인이 됐다.

    1961년,
    킹은
    미국이 나약해서 한반도 문제를 잘못 처리했음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Tail of the Paper Tiger>(종이호랑이 꼬리)
    라는 책을 집필했으며,
    많은 연설을 통해서 미국의 한국과 공산권에 대한 정책을 혹평했다.


    그는

    “한국전쟁은
    한반도가 아니라,
    게으른 제2전선인
    미국에서 패하거나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다”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인도차이나에서의 새로운 열전(熱戰: hot war)을 초래했다”

    등의 명언을 남겼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와 리지웨이


    킹은
    <종이호랑이 꼬리>에서
    1951년 상반기 한국전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미국정부가 맥아더를 본국으로 소환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한국전선에서 얻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거창한 승리였다.
    이는 미국이
    전 세계에 한국전쟁에 관해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었다.
    바로 제3차 세계대전에 연루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소련이 공개적으로 총공세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명분 있는 전쟁이라도 전투를 계속할 경우
    국내 정치적으로 역효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1895~1993) 장군이
    워싱턴 당국의 세부적인 지시까지 고분고분하게 복종한 것은
    대부분 그의 전임자에게 벌어졌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승인 받지 않고 공격하거나,
    적극적인 제안으로 미 행정부를 불쾌하게 하는 모험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그를 계속 승승장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유엔의 대의를 위해서 싸우는 그로부터
    귀중한 경험과 좋은 판단력을 빼앗아가 버렸다.

    리지웨이는 공적인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복지부동하고 있었다.
    도쿄의 다이이치 빌딩에 위치한 호화로운 그의 사무실에서
    나는 비공개를 전제로 그와 단독 회견을 한 적이 있다.
    당시 그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문:
    장군, 승리의 소임을 부여받은 군인으로서
    목표가 결코 승리가 아닌 제한 전쟁 수행을 강요받고 있는데 대해서
    일말의 후회를 느끼지 않습니까?

    답: 나는 미 국방부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문: 나도 그 점은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장군이 본부의 속박 대신에
    전투의 승리를 위한 명령-병력-군수물자를 절실하게 바라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보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은밀하게 장군의 속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답: 나는 미 국방부의 명령에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


    반면에 킹 기자는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영웅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지웨이 장군 밑에는
    훌륭하고 복종하는 군인인 동시에
    자기의 호불호를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강인하게 싸우는 장군이 있었다.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1892~1992) 주한미군사령관이다.
    정직하고, 무뚝뚝하며, 거친 다이아몬드 같은 그는

    12개 이상의 나라에서 전투를 경험했으며,
    부하들로부터 헌신과 충성을 얻는 능력도 겸비했다.
    그러나 종군기자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밴 플리트 장군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머리와 체력이 함께 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군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마치 승리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해 성실히 경쟁하는 운동선수 같은 인물이었으며,
    한국 전선에서도 그렇게 싸우려고 했다. 


  • 밴 플리트 장군은 쓸데없는 말로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느끼는 대로 말했고,
    말하는 대로 행동했다.

    그는 대학교 때 알았던 몇몇 위대한 풋볼선수들을 내게 상기시켰다.
    모두가 경기에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터치다운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말이다.

    그는 천부적인 리더처럼 보였다.
    나는 왜 장병들이 그를 좋아하고 신뢰하고,
    그의 지시에 충심으로 복종하며 싸우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 장군이
    미 국방부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공세를 시작하도록 적극적으로 건의하는 동안,
    미국 국방부는 전쟁을 포기하도록 더 큰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휴전 징비록 <4>: 종군기자들의 두 가지 유형



    무분별한 일부 종군기자들



    종군기자 오에치피 킹은
    미국정부 고위관리와 정치인들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해야겠다는 의지가 시들해지는 것 이외에,
    그들의 이런 행태를 부추기는 일부 종군기자들의 비열한 행태를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선전기구나 다름없는 종군기자들 덕분에
    공산군은 전선에서 달성할 수 없었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전쟁 수행능력의 기반을 침식해 들어갔고,
    모르는 사이에
    미국과 참전국 정부의 승리 의지를 계속 부식시켰으며,
    대한민국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자유세계 지도자들의 결심을 약화시켰다.
    "


    일부 종군기자들은
    전쟁의 지루함과 분노를 반영한 기사를 통해서
    한국전쟁이
    인기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확신을 키웠다.
    그들은
    전쟁을 무승부로 매듭짓는 편이 낫다면서,
    한국의 자유화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할 가치가 없다는
    사려 깊지 못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느 종군기자들은
    [한국군이 1950년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앞에 무너진 것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조국을 위해서 싸울 의지가 없었다는 증거라면서,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위해서 전투를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
    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런 보도는,
    1951년 4월 말,
    중공군이 춘계대공세로 한국 국경을 25마일이나 뚫고 들어왔을 때
    더욱 거세졌다.

    일부 종군기자들은
    한국군이 비겁하다는 잘못된 기사를 성급하게 전 세계에 퍼뜨렸다.
    한국군 제6사단이 총기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심한 비난을 받은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밴 플리트 장군은 조사를 통해서 진실을 밝혀냈다.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중공군은 미군 등 중화기를 보유한 유엔군에 대한 공격보다는 장비가 부족한 한국군 진지를 집중 공격했다.
    그곳에서는 포(砲) 공격을 덜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에 따라,
    중공군 12개 사단 12만 병력이
    인해전술로 한국군 제6사단(1만 명)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무려 12 대 1의 싸움이었다,

    한국군은 중화기나 박격포도 없이 소총과 경기관총만으로 용감히 싸웠으나,
    단시간 내에 6,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잔여 병력은 간신히 전멸을 피해 후퇴했다.



  • 밴 플리트 장군은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제6사단에 6.000명의 병력을 보충시키고
    대포 등 필요한 중화기를 지원해 다시 원 위치로 복귀시켰다.

    이후 6사단은 눈부시게 싸웠으며,
    나머지 전쟁 기간 동안 혁혁한 전과를 올려 미군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 같은 경험들을 토대로
    한국군이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런데 관심을 갖는 특파원들은 별로 없었고,
    전 세계에 한국군이 싸움을 못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기사를 쓰는데
    시간을 허비했다.”


    종군기자 짐 루카스


    반면에 이들과는 달리,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한국군과 국민과도 어울리며 올바른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하고,
    밴 플리트 장군의 지휘아래
    한국군이 막강한 전투기계로 변모되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했던 인물이 있었다.

    그는 짐 루카스(Jim Lucas, 1914~1970) 기자였다. 


  • 지방지 기자였던 루카스는,
    1942년 미 해병대에 입대해,
    종군기자로 과달카날-타라와-이오지마 등
    8차례나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전후
    <스크립스 하워드> 신문사(Scripps Howard Newspapers: 미국 18개 도시의 31개 일간지 및 일요신문 그룹)에 입사했으며,
    1947년 남극과 북극 탐험여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1951년 루카스는,
    한국전쟁 종군기자로 방한 후,
    휴전까지 26개월 동안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다른 특파원들은 알지도 못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 재미있고, 유익한 기사를 썼다.

    1954년 그는,
    인도적인 시각에서 휴전-포로교환 등을 보도한 공로로 퓰리처상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루카스는 미국 대통령과 100명의 상하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브리핑을 했던 유일한 언론인이며, 그의 사망 1년 후,
    오클라호마 주는 <짐 루카스 기념도서관>을 만들었다.


    짐 루카스의 기사


    6.25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 인근의 고지(Pork Chop Hill, 현재 비무장지대)를 점령 중인 미군의 삶을 그린
    루카스의 기사 <포크 촙 힐의 우리 마을>(스크립스 하워드 신문, 1953년 1월 3일)은
    너무도 인상적이다.

    “우리 마을에서 하는 일은 전쟁이다.
    생산하는 것은 죽음뿐이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 신세를 져야한다.
    음식-옷-우편물,
    심지어 파괴 무기까지도 바깥세상에서 수송해 와야 한다.

    우리 마을 촌장은 키 크고 곱상한 텍사스 출신의 중대장 잭 콘 대위다.
    (중략)
    이따금 대대장 골드버그 중령이
    우리 마을로 찾아와 돼지우리 같다고 야단이다.
    그는 죽음의 그림자가 서성대는 우리 마을을
    규율이 잡히고, 조직적이며, 자랑스러운 미 육군전투부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단히 부하를 채근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편, 6.25전쟁 3주년이 되는 1953년 6월 25일,
    <스크립스 하워드> 신문은
    <이승만 박사보다 더 고독한 사람은 없다>는 제목의 루카스 기자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 보도 1주일 전,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세계를 놀라게 하고,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정부와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듣고 있었던 점을 상기하며
    기사를 읽어보기로 하자.


    “이승만 박사가 없었더라면,
    한국 민중은 쉽게 우리(미국)의 의지대로 움직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박사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우리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중략)

    나는 이 대통령이
    여러 차례 자기주장을 굽히려는 막다른 순간까지 갔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쉬운 길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랄한 비판을 찬사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이를 때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박사는 공산치하에서 고통을 받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고,
    북한이 중국의 1개 성(省)이 되리라고 상상하고는
    고독하고 외로운 행로를 계속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한국 국민이 휴전을 반대함으로써
    미국 측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을 때
    이런 기사를 썼던 루카스 기자는 [한국의 진정한 친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감사의 표시로 루카스 기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휴전 징비록 <5>: 손익계산의 장(場)이 된 전쟁터


    휴전의 서막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맥아더 장군은
    유엔 결의에 따라 10월 11일 북진 명령을 하달했다.

    영국은 중공의 개입을 우려해 북진에 반대했으나,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11월 25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영국은 발언 수위를 높였다.

    비록 참전국 중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지만,
    영국군 숫자는 미군의 2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외교에 있어서는 미국보다 한 수 위였다.

    [실리주의자들]에게는 전쟁터도 좋은 손익계산의 장(場)이라던가?
    영국 정치인들이 바로 그랬다.
    영국 총리 애틀리(Clement R. Attlee, 1883~1967)는 즉시 워싱턴으로 날아가,
    1950년 12월 4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 양국 정상은 침략에 대한 지속적인 대응은 하되,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고,
    중공과의 평화협상을 제안하기로 약속했다.
    특히 한국전쟁에 관한 정책을 유엔에서 결정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영국은 전투가 아닌 외교를 통해서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트루먼-애틀리 회담 직후인 12월 14일 유엔총회가 휴전 추진을 결의했지만,
    공산측은 전황이 자기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각 반대했다.

    12월 23일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12월 25일 리지웨이 중장이 지휘봉을 받았다.

    그런데 19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리지웨이를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1951년 4월 14일 리지웨이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유엔군사령관과 제8군사령관 교체는,
    공산군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22일부터 춘계대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안겨줬다.
    이 전투에서 적은 무려 2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해야만 했다.

    밴 플리트는 38선을 넘어 대응공격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워싱턴 당국의 제지를 받았다.
    이는 앞서 언급한 트루먼-애틀리 정상회담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북한과 중공군은
    그들의 실질적인 지휘관인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분명했다.

    이들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6개월 전에 거부했던 휴전을 소련인의 입을 빌려 전파했다.

    바로 1951년 6월 24일,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Yakov A. Malik, 1906~1980)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휴전과 외국군 철수를 제안한 것이다.

    미국은 유엔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게 교섭권을 부여했고,
    그는 6월 30일 방송을 통해 휴전협상을 희망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 1일 북경방송은,
    김일성과 팽더화이의 이름으로 동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휴전 가능성이 전 세계 신문들의 주요지면을 채웠으며,
    논조가 너무 낙관적이어서
    독자들은 한국전쟁이 거의 종결된 것 같은 인상을 받기에 충분했다.

    한편, 리지웨이가 성명을 발표하기 3일전,
    이승만 대통령은
    “무서운 전쟁의 서곡이 될 수 있는 휴전안”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7월 1일 부산에서는 휴전을 반대하는 대규모 국민궐기대회가 열렸다.


    휴전회담 개시


    우리나라의 거족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회담이 개최됐다.

    양측에서 각각 5명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유엔측은,
    수석대표 조이(Charles Turner Joy, 1895~1956) 등 미군 장성 4명과
    한국의 백선엽 장군 1명이었고,
    공산측은,
    남일 등 북한군 3명, 세팡(謝方) 등 중공군 2명이었다.

    당시 회담을 취재했던 오에치피 킹 기자의 입을 통해서
    10개월간 유엔측 수석대표 조이 제독이 직면해야했던 비극을 들어보기로 하자.


    “조이 제독은 양심적이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그는 휴전 성취라는 소임에 자신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뛰어난 군 지도자들처럼
    그도 적에게는 선의가 부족하며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조약 따위는 아랑곳 않고 다시 침략해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협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조이는
    첫 회담부터
    공산측이 모욕과 허무맹랑한 장광설로 공세를 취해도
    냉정을 잃지 않고 조용히 임무를 수행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아무리 야만적 행위로 화나게 해도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위엄을 잃지도 않았다.
    또한 자기 목적에서 일탈하지 않았고,
    비신사적인 행위로 대응하지도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하루는 성명을 발표하고,
    다음날은 이를 부인했으며,
    조이 제독의 질문에
    터무니없는 비난으로 대꾸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 번은 조이가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인내심을 보임으로써
    그들의 협상기술을 무색케 했다.
    조이는 질문한 다음 공산측 수석대표 남일의 대답을 묵묵히 기다렸다.
    무려 2시간 11분이나 회의장 천막 안에는 단 한 마디도 교환되지 않았다.

    이것이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스타일이었다! 

    1952년 3월 중순,
    나는 조이 제독과 마지막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이 협상을 결코 시작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 대신 한국에 4개 사단을 더 상륙시켜서
    생명을 덜 희생시키고 평화를 정착시켜야 했습니다.

    휴전협상은 우리의 조건이 아닌 공산주의자들의 조건에 따라서 이뤄지고,
    휴전이 이뤄질 때까지 수많은 희생자들을 낳게 할 것입니다.

    워싱턴 당국은 공산주의자들의 휴전 위반행위를 완전히 보장해주고,
    내게는 중요한 사안에 대해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굴복하는 일 이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 회담에서는 침착성을 않았던 조이 제독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매주 마다 눈에 보이게 모습이 노쇠해졌던 것이다.
    1952년 5월 22일,
    그는 수석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미 해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조이는 귀국 후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이 서한에 그는 적었다.


    "귀국 직후
    한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휴전협상에 관해서 유익한 비망록을 제출하거나
    직접 보고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미국정부는 나를 찾지 않았답니다."


    조이는 1956년 6월 6일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61세였다.

    의료기록에 따르면, 사망원인은 백혈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부인에게
    "공산주의자들이 남편에게 총격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백혈병보다 더 큰 사망원인을 제공했을지도 모릅니다"
    라는
    요지의 애도의 메모를 보냈다.

    그는 실제로 한국전쟁의 안타까운 희생자였다.” 




    사망하기 6개월 전,
    조이 제독은
    <How Communists Negotiate>(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 1955.11월)란 책을 발간했다.

    생명을 대가로 간파(看破)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을 담은 이 책은,
    워싱턴 당국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비망록이자, 징비록이지만,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준다.




    휴전 징비록 <6>: 공산측 실제 수석대표는 中 세팡


    휴전회담 연락장교 이수영 중령



    1972년 4월 21일 새벽(현지 시간)
    이수영(李壽榮: 1921~1972) 주 프랑스 한국대사가 파리에서 타계했다.

    자살로 발표된 그의 죽음은
    우리 정부는 물론 프랑스 외교가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무려 7년간 프랑스 대사로서
    파견국은 물론 대 아프리카 외교에도 큰 공헌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 특히 6.25휴전 60주년을 맞는 올해는
    다른 이유로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휴전회담 중에 연락장교(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이자,
    한국측 대표였던 백선엽 장군을 보좌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3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 후 국내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가
    해방 후 국군 장교가 됐다.

    영어-일어-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휴전회담에서 한국정부와 유엔군 간의 의사소통 창구 역할을 했으며,
    협정조인 후에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휴전의 교훈 등에 관해서 강연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군복을 벗고
    외무부 정보국장을 거쳐 차관으로 재임 중에 4.19혁명을 맞았다.
    혁명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국 망명을 위한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주고,
    김포공항에서 전송했던 인물도 바로 그다.
    5.16혁명 당시 유엔대사로 근무 중이던 그는,
    1964년 공보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1965년 주프랑스대사로 부임해 일하다 타계했다.

    최근 이수영 중령이 휴전회담 당시 북한군 장교에게 수모를 당했다느니,
    “서툰 영어”를 구사했다는 등 거짓 정보들이 유포되고 있다.
    이는 자랑스러운 군인이자 외교공무원으로서 헌신했던 고인은 물론,
    대한민국의 국격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날조된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은
    가증스럽게도 휴전협상에서 북한대표가 대단한 역할을 한 것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휴전회담의 공산측 대표의 실체


    그러나 당시 유엔측 수석대표 조이 제독은,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에서
    다음과 같이 공산측 대표단의 실체를 폭로하고,
    이수영 중령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공산측 수석대표 남일은
    체격이 작고 호리호리하며 상당히 기운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강력하게 내뱉듯이 말하는 그는
    한 번도 유머를 구사하지 않았으며, 빈정거리는 투로 웃기는 했다.
    미끈한 얼굴에 좀처럼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으나,
    이따금 화를 내거나 놀란 척하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식 북한 군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군화는 언제나 반들반들했다.
    그는 회담기간 내내 신경과민증 환자처럼 보였는데,
    이유는 명목상의 수석대표였기 때문이다.




  • 공산측의 실질적인 수석대표는 중공의 세팡(謝方)이었다.
    가냘프고 몹시 여윈 체격인 그를 보고
    나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욘드 캐시어스는
    [야위고 굶주린 표정이구나. ····· 그런 인간들은 위험하다]는
    시저의 대사를 떠올렸다.
    그는 실로 위험한 인물이었으며,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다.
    머리를 짧게 깎아 이마가 높아 보이는 그는,
    회의록을 보면서 매서운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세팡은 다른 공산 대표들과는 달리
    소련식 공산주의 교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발언 전에 남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남일은 미국을 비난하는 장광설을 시작하기 전에
    세팡으로부터 묵시적 승인(고개를 끄덕임)을 얻어내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남일이 언제나 준비된 자료를 읽는 반면,
    세팡은 즉흥적이고 유창하게 말했다.  


    남일은
    줄담배를 피고,
    연필을 만지작거리다 부러뜨리기도 했으며,
    부스럭 소리를 내며 종이를 만지는 등
    회의 기간 내내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안절부절 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일은
    가끔 세팡으로부터 지시가 담긴 간략한 메모를 전달받고는
    그대로 따르는 것 같았다.


    공산측 대표 중에 이상조도 있었다.
    교조적인 공산주의자인 그는,
    회담에서 주제와 상관없는 쓸데없는 얘기와
    공산주의 교리를 끝없이 늘어놓고 반복하는
    뻔뻔스런 거짓말쟁이였다.
    작고 땅딸막한 그는 더럽고 지저분했으며,
    회담 중에 파리가 얼굴에 기어 다녀도 쫓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뒀다.
    대단한 극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나는 파리를 몸에 붙이고 다니는 더러운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 번은 이상조가 남일에게 한글로 메모를 써줬는데,
    글씨가 커서 우리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제국주의 심부름이나 하는 자들은 상가집 개만도 못한 놈들이다]는 내용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회의 테이블을 건너가 이상조에게 한 방을 먹이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이수영 중령과 공산측 연락장교


    조이 제독은 이 책에서 대표단은 아니지만,
    협상에서 대표들 못지않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연락장교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 한국군 연락장교 이수영 중령은
    한국어-영어-일본어-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뿐 아니라,
    독일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천부적으로 언어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북한군 대좌 장춘산은
    작고 단단한 체격의 소유자였는데,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사했다.
    영어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중공군의 총애를 받아서
    공산측 대표단 중에서 상당한 비중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자성문(紫成文)은 키가 크고 말이 없었다.
    그는 품위 없는 중공 의용군 복장을
    훈장이나 장식이 없이 차려입었는데
    기품은 있어보였다.
    장춘산이나 자성문은 공산주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는 교조주의자였다.

    첫 번째 연락장교회의 때
    유엔측은 키니 대령-머레이 대령과 이수영 중령이,
    공산측은 장춘산과 자성문이 참석했다.
    이수영 중령이
    회의장에서 접는 의자에 앉다가
    의자가 넘어져서 바닥에 자빠졌다.
    자성문은 그 광경을 보고 크게 웃었으나,
    소련군에서 훈련받은 장춘산은 말없이 돌처럼 무표정했다.  
     
    한 번은 이수영 중령이
    판문점에서 장춘산과 자성문을 만나
    영어로 메시지를 전달하자,
    장춘산이 화를 내며,
    "조선사람 아니오?
    왜 조선어로 말하지 않는 거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중령은 정색을 하고 강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내가 사용하고 싶은 언어로 말하고 있소.
    우리는 바로 이런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 당신들과 싸우고 있는 거요."

    자성문은 둘의 말싸움을 즐기는 것 같았다.



    휴전 징비록 <7> 이승만과 김일성


    소련과 중공의 꼭두각시 김일성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에서
    조이 제독은
    휴전회담의 공산측 실질적 대표가 남일이 아니라,
    중공군 지휘관 세팡이라고 단정했다.
    이는 해방이후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실권자가 김일성이 아니라
    테렌티 스티코프(1907~1964)였던 것과 흡사하다.

    이는 6.25전쟁이
    중공과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 집단의 반민족적 행위임을 증명하고 있다. 

  •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나자
    스탈린은 정치 장교인 스티코프를
    북한의 소련 군정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스티코프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한편,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드는 기반을 마련했다.

    1946년 2월
    연해주 군관구의 실력자가 된 이후에도
    스티코프는 김일성을 원격 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대한민국과 북한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1948년 10월 16일,
    스티코프는 북한주재 소련대사로 부임해
    1950년 12월 14일까지
    2년 2개월 동안 김일성과 한반도 적화를 위한 전쟁을 공모(共謀)했다.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고,
    소련군과 중공군으로부터 훈련받은 지휘관들이 주축인 북한군은
    전쟁 초기에 한국군을 궁지로 몰았으나,
    3개월 만에 전세는 역전돼 거의 궤멸 당했다.
    1950년 10월 11일,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시작해 압록강까지 진격함으로써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때 중공군이 개입했다.

    참고로 종군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02~1966)는
    한국전쟁에 관한 명저
    <War in Korea>(1951, <자유를 위한 희생>
    이라는 제목으로 2009년 국내 번역출판)에서
    전쟁발발 직후에 벌써 소수의 중공군이 파병됐다고 폭로한 바 있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 땅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총회는 1950년 12월 14일 휴전을 결의했지만,
    공산측은 결의안에 즉각 반대했다.

    주목할 만한 일은
    바로 이날 6.25전쟁 도발의 공모자 스티코프가
    북한대사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미국을 더 이상 자극하다가는
    소련이 위험할 지도 모른다는 스탈린의 계산된 행동이자,
    확전에 대한 두려움의 표시로 보인다.

    한편 1951년 1월,
    서울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유엔은 중공군을 침략자로 규정했으며,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3월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춘계대공세를 개시했으나,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1951년 6월,
    소련은 전략적으로 평화안을 제의했으며,
    그해 7월에 개시된 휴전회담은,
    스탈린 사망 144일 후인 1953년 7월 27일 조인됐다.

    조이 제독의 눈에 비친
    북한의 휴전회담 대표 남일과 6.25전쟁 도발자 김일성은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의 <징비록>에 등장하는 이여송이나 진린과 같은
    거만하고 안하무인격인 명나라 장수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했던
    조선 조정의 관리들과 너무도 닮아 보인다.

    오늘날 우리 좌파지식인들이
    휴전회담에서
    미군 대표와 당당하게 겨룬 것처럼 떠드는 남일은
    실제로는 세팡의 눈치나 보고 지시를 따라야했던 괴뢰였다.
    또한 그들이 주석이라고 부르는 김일성은
    스티코프가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야만 했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당당한 주권국가의 대통령 이승만


    반면에 우리는 어떠했나?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
    정치경험이 없는 하지(John R.  Hodge, 1893~1963) 중장이
    남한의 미 군정청 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정치지도자들과 알력관계에 있었다.

    이승만은 그를 용공주의자-친소주의자로 몰아 부칠 정도였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되,
    원래 평화적 통일을 염원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취임연설 일부를 잠시 들어보기로 하자.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해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반역 행동을 버리고,
    남북통일의 정신으로 우리 강토를 회복해서
    조상의 유업을 완전히 보호해야합니다.
    공산이냐 무엇이냐는
    우리끼리 합하여 민의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북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깨닫고
    우리와 같은 보조를 취하기 바랍니다.
    하루 빨리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의 모든 권리를
    한민족 모두가 다 함께 누리게 하도록 해주기 바라며,
    부탁합니다.”


    그러나 철저히 준비된 공산주의자들의 전쟁도발에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일본 점령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 등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그의 외침은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으로 이어졌고,
    전열(戰列)을 정비한 국군과 국민의 총화로
    적은 원래의 위치로 쫓겨났다.

    그 상황에서 미국과 유엔이 휴전을 추진하자
    이승만은 격렬히 반대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평화애호가가 아니었다.
    그는 동족의 가슴에 총뿌리를 겨눈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배후조종자들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야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심지어 휴전협정 조인이 임박한 1953년 6월 18일
    27,000여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미국 대통령을 분노케 만들고,
    세계를 경악시켰다.

    죽음을 각오한 모험이었다. 


  • 중공의 팽더화이-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휴전회담 최종서명자 중의 한 사람인
    마크 클라크(Mark Clark, 1896~1984) 장군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1954년) 라는 저서에서
    휴전회담 당시의 대한민국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조인할 어떤 휴전도 파탄시키겠다는 위협을 반복했다.

    지혜롭고 존경할 만한 애국자인 대한민국 국가원수와 나의 관계는
    미국이 휴전 의도를 명백히 하기 전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비통함과 좌절감에 빠진 그에게
    매를 맞는 소년의 처지로 전락했다.


    긴 안목으로 보면,
    한반도에 승리의 깃발을 꽂을 때까지
    한국과 함께 미국이 전쟁을 하도록 하겠다는 그의 외골수 결심이
    정당했다고 증명될 날이 도래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전쟁이 한반도 밖으로 확대돼야했는데,
    미국정부나 유엔 연합국들은 그럴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6.25전쟁과 휴전 과정에서
    김일성-남일은 소련과 중공의 꼭두각시였던 반면,
    이승만은 유엔군사령관은 물론,
    미국 대통령도 두려워할만한 당당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휴전 징비록 <8>

    공산주의와 협상의 핵심은 자유와 힘


  • 이순신 장군이 전란 중에 <난중일기>를 남겼듯이,
    조이 제독도 휴전 협상 중에 일기를 썼다.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이란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일기는 그가 사망한 지 22년 만인 1978년
    <싸우며 협상하기(Negotiating While Fighting)>라는 476쪽 분량의 책으로 발간됐다.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과 대응전략


    조이 제독이 갈파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둘러 협상에 뛰어들지 않고 무대 설정에 신중을 기한다.
      2)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이 담긴 의제를 들고 나와
          시작부터 상대를 방어적인 지위로 만든다.

      3) 사건들을 조작해서 유리한 협상 여건을 조성하거나 선전목적에 활용한다.
      4) 지연전술로 상대의 지위를 약화시킨다.
      5) 나중의 범죄행위를 위해서 가능한 한 약속을 적게 한다.
      6) 이익 확보를 위해서 거부권을 행사한다.
      7) 그럴싸한 거짓 쟁점을 도입해서 흥정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8) 진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며, 왜곡 전술을 더 많이 구사한다.
      9) 상대가 양보하면, 약점으로 알고 몰아 부친다.
    10) 합의내용을 부정하고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11)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상대를 피곤하게 만든다.


    이 같은 협상전술에 대한 대응전략
    조이 제독은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1) 회담 기간은 짧아야 한다.
    2) 회담 장소는 분쟁지역 밖이어야 한다.
    3) 서둘러 공산측의 회담제안에 응해서는 안 된다.
    4) 아무런 대가없이 양보해서는 안 된다.
    5) 서두르는 태도를 피하라.
    6) 회담의제를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7) 확고한 입장이 서면,
        최종안을 제시한 후 상대의 말장난에 장황하게 대꾸하지 말고,
        침묵하든지 단호하게 대응하라.

    8) 구체적인 정치목표를 갖고 회담에 응해야한다.
    9) 상대를 진지하게 휴전회담에 응하게 하기 위해서 군사적인 위협을 병행해야한다. 


    “미국이 수용했던 것과 같은 휴전은 없었어야 했다”


    [이 고통, 이 많은 상처와 경고들로부터 얻은 교훈]
    (From this Thorn, these Wounds, these Warnings)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협상전략>의 마지막 챕터는,
    마치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는 듯하다.

    조이 제독은
    미국이 언제 어떻게 휴전을 모색하게 됐는지에 관한 이유 여섯 가지를 열거하고,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근거 없는 것인지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미국정부가 보여준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 유엔군사령부는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없었다.
    때문에 휴전만이 현실적인 행동 방침이었다.

    군사적 승리는 불가능하지 않았고,
    더구나 승리가 특별히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중공에 대한 효과적인 봉쇄가 이뤄졌더라면,
    아마 휴전회담으로 소비된 시간보다 짧은 기간 내에
    군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2) 전쟁이 중공과의 전쟁으로, 나아가 세계전쟁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었다.

    1950년 11월 중공이 공격해 왔을 때,
    유엔이 즉각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
    소련은 한국전쟁을 확대시킬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소련의 휴전 제안이 그 증거다.
    소련이 중공 편으로 끼어들었다면,
    파멸을 맞았을 것이고
    자유세계를 위해서는 난공불락의 강력한 힘이 구축되었을 것이다.

    (3) 전쟁이 계속됐더라면, 뜻하지 않게 전면전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전면전의 개시를 위해서는
    적의 치명적인 표적에 핵무기를 발사하는 결정이 필요하며,
    이런 결정은 [우발적]이거나 [점진적]일 수 없다.
    과거와 달리 오늘의 제한전과 전면전 차이는 인류의 생사가 달린 문제며,
    오랜 숙고 없이 전면전을 할 수는 없다.
    만약 미국이 전면전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면,
    이는 소련이 이미 그런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 휴전으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 사이의 미군 사상자 수는
    미국이 휴전 대신에
    결정적인 군사작전을 통해 승리를 거뒀을 경우에 나타났을 사상자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
    휴전회담 기간 중 수많은 유엔군 포로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사살됐다.

    (5) 휴전은 향후 공산측의 더 많은 침략을 단념시켰다.

    첫째, 휴전은 중공을 미국과 무승부의 전쟁을 한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만들어줌으로써
    아시아에서 막강한 지위와 영향력을 갖게 만들었다.
    둘째, 휴전은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산 침략을 저지하기는커녕 도움을 줬다.

    (6) 휴전은 많은 공산포로의 전향으로 선전효과 면에서 공산측에 엄청난 패배를 안겨줬다.

    첫째, 휴전회담은 선전의 승리를 모색하는 곳이 아니다.
    둘째, 그런 선전의 [승리]가 미국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
    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의 대규모 전향이 이뤄져
    아시아 공산주의 기반이 흔들리는 원인이 됐는가?
    중공의 지위를 추락시켰는가?
    물밀듯 도피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대규모 전향자들은 어디 있는가?
    공산군이 인도차이나에서 투항하기라도 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해,
    우리는 휴전의 승리자는 중공이었다고 대답해야 한다.


    자유를 위한, 힘을 통한 협상


    조이 제독은 특히
    유엔측이 포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자는 제안을 관철시키는 데
    15개월이 걸림으로써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음을 개탄하면서,
    공산측이 이를 수용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공산측이 확전(擴戰)이 임박했다는 불길한 소문 때문에 동의했다고 확신한다.
    1953년 봄,
    미국은
    중공영토에 대한 군사작전 확대 여부 및 핵무기 위협도 검토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존중하는 협상의 요소인 힘의 사용 의지 표출이었다.
    자제력을 잃은 미국 군사력에 대한 도전은
    중공에게 파멸의 길이었다.
    그들은 대학살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서
    포로의 정치적 망명을 수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이 제독은 자유세계 시민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맥아더 장군은 말했다. [승리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결과적으로 그가 옳았음이 입증됐다.
    그러나 공산주의와의 분쟁은 총기-함정-항공기 싸움만이 아니다.
    군사 위협-사상-외교수단-경제압력 등의 투쟁이며,
    끝장을 봐야하는 싸움이다.

    공산주의의 어둠이 세계를 집어삼키든지,
    자유의 깃발이 모든 나라에 휘날리든지

    어느 쪽의 승리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자유세계가 승리자가 되려면,
    자유라는 대의를 위해서 협상이 최고로 기여할 수 있을 때에
    공산주의와 교섭에 들어가야 한다.
    단순히 적이 원하기 때문에 협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일단 협상이 자유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결정했다면,
    모든 힘을 동원해서 협상해야 한다.
    우리는 힘을 바탕으로 협상을 시작할 뿐만이 아니라,
    힘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협상해야만 한다.”



  • 휴전 징비록 <9> 마크 클라크 장군의 휴전 회고


    휴전 협정의 조인



    1952년 5월 22일,
    마크 클라크 장군이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됐으며,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1895~1987: 클라크의 미 육사 동창) 중장이
    같은 날 조이 제독 후임으로 휴전회담 유엔측 수석대표가 됐다.

    클라크와 해리슨은
    공산측과 포로교환이라는 마지막 의제를 마무리 짓고,
    휴전협정에 서명한 역사적인 인물이 됐다.
    당초에는 클라크와 북한의 김일성-중공의 팽더화이가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최종 순간에 공산측은 세 사람이 각기 자신의 사령부에서 서명하고,
    판문점에서 쌍방의 수석대표인 해리슨과 남일이 서명하자고 요구했다.
    공산측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의 이유에 대해서
    김일성과 팽더화이가 판문점으로 오는 도중에 유엔군의 공습을 우려했다거나,
    김일성이 이미 숙청 혹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유엔측의 수정제안에 따라
    해리슨과 남일이 판문점에서 사인하고,
    12시간 후에 교전을 중지하며,
    쌍방의 최고사령관은 나중에 각자의 사령부에서 서명하기로 했다.

    1953년 7월 27일 10시 판문점에서 거행된
    해리슨과 남일의 조인식에는 300명이 참관했으며,
    이중에는 57명의 유엔측 기자도 포함됐다.
    3시간 뒤 인 오후 1시
    클라크 장군은
    문산의 유엔기지 내 극장의 무대 위에서
    유엔참전국 대표들과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했다.

    클라크 장군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라는 회고록
    에서
    그날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1953년 5월 25일 이후
    휴전회담을 보이코트 해온 최덕신 소장이
    참석한 것을 보고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서명을 위해 마련된 무대 위에는
    동영상 뉴스와 TV카메라를 위해서 설치된 조명 때문에
    찌는 듯이 더웠다.
    파커 회사에서 보내준 만년필로
    18차례 휴전 문서에 서명을 마친 후에
    나는 짤막한 성명서를 읽었다. 

  • [이 시간에 나는 마음속으로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이 휴전을 인류에게 유익하게 만들기 위한
    우리의 힘든 노력이 성공하기를 기도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오늘 휴전협정 조인을 통해서
    희망을 얻기 보다는 자유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경계와 노력을 늦추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가 다른 나라를 직접 무력으로 침략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할 수 있으나,
    적이 패하지 않은 채 전보다 더욱 강력하고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적이 강해졌다는 의미는
    아시아 공산군이 현대 지상전의 방법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전투에서
    우리는 그들이 몰랐던 것을 가르쳐줬으며,
    그들이 대가로 지불한 것은
    그들의 가치 척도에서는 하찮은 인간의 생명이다.”


    위의 클라크의 회고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최덕신 장군의 참석에 관한 언급이다.
    대한민국은 휴전회담 개시부터 조인에 이르기까지 줄곧 반대해왔다.
    때문에 공산측에서는
    휴전 성립 후 한국군의 공격을 두려워했으며,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한 전폭적인 경제 및 군사원조, 안전보장 등을 조건으로
    최종순간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클라크 장군의 휴전 징비록


    클라크 장군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의 마지막 장에서
    조이 제독과 마찬가지로 휴전에 이르게 된 미국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미국과 자유세계의 가장 중요한 결단은
    중공군이 1950년 11월 전투에 뛰어들었을 때 취해졌어야만 했다.
    세계전쟁으로의 확산 위험을 무릅쓰고
    중공군에게 즉각 철수하지 않으면,
    핵심시설을 공격하겠다고 경고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단호한 결의만 있었다면,
    중공군을 응징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데,
    정부가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은 데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실망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휴전을 결정한 이상,
    그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따랐다.

    휴전협정이 마무리 되고,
    협정에 조인하면서 솔직히 마음이 무거웠다.

    당분간 살인행위가 중지된 것은 고마운 일이었지만,
    한반도에서 공산침략자들을 완전히 패퇴시킨다는 결정을 한 경우보다
    더 값비싼 피의 희생을 훗날에 우리 국민이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탄환은 공산주의자들을 살해할 수 있지만,
    탄환만으로 공산주의를 죽일 수는 없다.
    공산주의는 빈곤과 불만이 있는 곳에 번식하는 암(癌)적인 존재며,
    우리는 바로 두 가지 적과 싸워서 이들을 패퇴시켜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직접 침략으로 성공하지 못했던 것을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파괴-악의적인 선전을 통해서
    성취하려고 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전쟁 전에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지금은 성공가능성이 훨씬 희박하다.
    다만,
    공산주의에 대한 한국인의 반공정신을 강화시키고,
    굳건한 반공정신에 필요한 경제적 조건을 구비시켜주는 일은
    미국의 몫이다.


    미국은
    경제지원을 통해 한국인의 생활수준을 높여서
    공산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고,
    굶주리고 의기소침한 북한주민들에게 부러움을 갖도록 해야 한다.
    높은 생활수준이야말로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자들의 모략-선전 및 선동에 대항해 사용해야할
    중요한 무기다.
    전쟁 중에 200만 명의 북한인이 남하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 새로운 유형의 경제전쟁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세계분쟁에서 최후의 모습이 될 것이다
    대량파괴수단을 보유한 양측은
    아마 가공할 병기를 사용치 않을 것이며,
    나는 그렇게 되기를 열렬히 염원한다.

    그러나 평화는
    1) 우리가 강하고,
    2) 이 사실을 공산주의자들이 알며,
    3) 만일 전쟁 발발 시
    우리에게 막강한 힘을 사용할 결의와 용기가 있음을
    공산주의자들이 확신하는 경우에 보장될 수 있다
    .”


    종군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는
    <News is a Singular Thing(뉴스는 유일한 것)>(1955)
    이라는 저술에서
    클라크 장군이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얻은 훌륭한 경험을
    한국에서 잘 활용할 수 있었지만,
    미국정부가 그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았음을 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평화와 장밋빛 미래에 대한 정치적인 수사가 우리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국가적인 풍조에 기여한다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미국 국민이 평화의 꽃을 잡아 뜯으려는 위험한 쐐기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 




    휴전 징비록 <10>

    휴전의 교훈-북한에도 불빛을!


    잘못된 전쟁?



    1950년 11월 중공군이 6.25전쟁에 개입하자,
    맥아더 장군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승리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한국전쟁을 지휘했던 브래들리(Omar Bradley, 1893~1981) 합참의장은
    의회증언을 통해서 맥아더를 강하게 질책했다.


    “중공은 세계 지배를 노리는 강력한 나라가 아닙니다.
    맥아더의 전략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 이 발언은 맥아더의 소환으로 이어졌고,
    이후 어느 미군지휘관도
    감히 브래들리의 눈에 벗어나는 공개 행동이나 발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잘못된 전쟁]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지휘관이 있었다.
    최고의 야전지휘관 중 한 사람이며,
    인간미 넘치고,
    정력적인 <밴 플리트> 미제8군사령관이었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뉴스는 유일한 것>이라는 책에
    밴 플리트 장군의 발언
    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도대체 민주주의 국가가
    올바른 전쟁 장소나 시간을 선택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민주국가는 전쟁을 도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유일한 선택은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받은 곳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만약 이번에 공산주의자들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휴전에 성공하면,
    민주국가들,
    특히 미국은 수세기 동안 악몽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그때 공산주의를 저지했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지 않기 바랄뿐입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휴전에 관한 견해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이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밴 플리트는 세계 최강대국의 4성 장군이었고,
    이승만은 약소국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스티코프와 김일성 같은 주종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밴 플리트는 이승만을 존경했고,
    한국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로 만들기 위해서 헌신했다.


    휴전으로 우리가 얻은 것


    미국정부의 휴전 방침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한반도 전체에 자유민주국가를 세워야한다는
    그의 올곧은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음을 무릅쓰고 자유를 위해 싸웠던 대한의 장병들과
    밴 플리트 장군 같은 든든한 후견인들이 없었다면,
    그의 신념은 한낮 욕심에 불과했을 것이다.

    휴전 조인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거세게 저항했고,
    이 대통령은 급기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미국정부는 이승만을 설득하지 않고는 휴전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인
    로버트슨(Walter Robertson, 1893~1970)  미 국무부차관보가
    6.25전쟁 3주년을 맞아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 거리와 중앙청 건물에는
    주로 영어로 휴전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시위 군중은 북진통일을 외치며 거리를 메웠다. 


  • 로버트슨은 18일간의 체류기간 동안 거의 매일 이승만 대통령과 만났다.
    회담 기록은
    이 대통령의 계속 이어지는 요구를 거의 모두 수용하기 위해서
    미국이 최대한 노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통신사는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을 [소휴전회담](Little Truce Talks)이라고 보도했다.

    1953년 7월 12일 도쿄로 출발할 때,
    로버트슨은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이 대통령의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내용은 아이젠하워의 요구를 받아들여
    휴전의 성립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대가로
    이 대통령은 로버트슨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았다.  


    1) 휴전 성립 후, 한미방위조약을 체결
    2) 장기 경제원조 및 제1차로 2억 달러의 원조 제공
    3) 휴전협정 조인과 동시에 약 950만 불에 해당하는 식량 지원
    4) 휴전 후로 예정된 정치회담에서
        90일이 경과해도 구체적인 성과가 도출되지 않을 경우,
         양국은 정치회담에서 철수하고,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미래의 행동에 관해서 논의

    5) 정치회담 개시 전에 양국의 공동목표에 관한 고위급회담 개최
    6) 한국군 육군 병력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며,
        해군과 공군도 적정한 수준으로 확대


    이런 약속이외에
    이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위상이 현저히 높아지는 특별 배당수익도 받았다.
    즉,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정부에게 정면 도전한 이 대통령에게
    미국 대통령 특사가
    6월 26일부터 7월 12일까지 매일 찾아와
    협조를 요청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렇게 자유-공산세계가 전쟁을 계속할지
    혹은 휴전에 조인할 지를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됐다.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바로 (북한과는 달리)
    한국이 꼭두각시 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 세계에 증명해주었다는 점이다.” 



    국군장병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며!


    이제 위성사진을 다시 한 번 볼 차례다.
    암흑천지인 북한과 찬란한 불빛으로 빛나는 대한민국의 야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진,
    세계인을 위한 훌륭한 이념교육의 전시품 말이다.

    같은 민족인데,
    이런 극명한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답은 우선 최빈국에서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우리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휴전 후 오늘까지의 대한민국 현대사는
    자주-자유민주혁명-경제혁명이라는 세 단어로 압축해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반면,
    북한의 몰락은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인 김일성 일가를 포함한 특권 계급이
    절대권력 유지와 쾌락을 위해서
    주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온갖 희생을 강요한 데서 파생된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주민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대하노라면,

    60년 전의 휴전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 이승만-맥아더-클라크-밴 플리트 등의 주장대로
    공산군의 항복을 받아냈더라면,

    지금 그들은
    자유민주통일국가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며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역사의 가정(假定)처럼 허망한 것이 없다.
    휴전은 어제, 오늘, 그리고 통일의 그날까지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또한 휴전은 비록 한반도의 반쪽이지만
    오늘 대한민국이 찬란한 빛을 발하게 만든 촛불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 괴뢰군(傀儡軍)이 불법남침을 개시했을 때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
    고귀한 목숨을 던져 이 땅의 자유를 지켜준 자랑스런 국군장병과 유엔군 장병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무한한 경의를 표하며 연재를 마친다. (끝) 



    편집자
    이 기사는 7월15일부터 26일까지 '국방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사진은 필자 소장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