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1일 오피니언면 '시론'에 이병민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쓴 '영어교육, 목표가 선명해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시론지난 시론 기사 보기인수위의 영어교육 정책 발표로 모두가 혼란해하고 있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영어로 의사 소통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나라’는 한국을 ‘이중 언어’ 사용 국가로 끌고 가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국민적 합의 없이 고집스럽게 끌고 나가면 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같은 꼴이 날 수도 있다. 국민을 행복하게 하자는 것이 목표라면 합리적 선택이 필요하다.

    ‘의사 소통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그것이 이명박 당선인의 수준인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수준인지 알 수 없다. 영어로 하는 영어수업만으로 그런 수준을 달성할 수 있는지, 영어 몰입교육을 실시해야 하는지는 그 다음에 판단할 문제다.

    많은 국민이 현 학교 영어교육에 만족해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가 무한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는 현실과 맞지 않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어떤 선택이 가능하고, 누가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현실 여건은 어떠한지부터 살펴야 한다. 인간에게 언어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국가정책으로 하루아침에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목표가 결정되면 비로소 구체적인 방법론을 모색할 수 있다. 대다수가 공감하는 영어교육의 목표는 현재보다 확대된 형태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교육체제는 중앙에서 결정하고 전국이 유사한 모형으로 가는 구조다. 이러한 산업사회 교육모형 때문에 일시에 무엇을 바꾸고 여건에 맞지 않아도 무리하게 실시하려 한다. 차제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어교육을 영어로 진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단일 모국어 환경에서 필요가 없었으며, 말보다 글에 치중했던 것이 우리 언어교육 전통이다. 대학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중·고교에서 영어로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대학에서 잘 길러낼 수 있도록 방향을 전환하고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것이 정도이고 선순환 구조다. 공교육에서 10년 동안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지만 10년 동안 영어를 가르친 적이 없다. 읽기·쓰기·듣기·말하기를 모두 가르치면 한 기능에 겨우 200시간 정도 할애할 수 있다. 그 정도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학생이 나올 수 없다. 교육시간을 늘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100% 몰입교육을 하지 않으면 초·중·고교 교육을 통해 영어를 완성하겠다는 것은 무리다. 필요에 기반을 둔 영어교육은 평생 이루어져야 한다.

    영어 상용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되어 있다. ‘고비용 저효율’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수준별 수업도 손 봐야 한다. 영어교육 과정 자체를 일괄적으로 통제해 놓고 수준별 수업은 가능하지 않다. 영어교과만이라도 학년별 구분을 없애고 다양한 교과를 개설해 수준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보통신 기술이 세계 최고라는데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두 번째 삶(Second Life)과 같은 온라인 영어마을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우후죽순으로 만들어 놓은 영어마을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전국영어마을협의체’를 만들어 전국 학생에게 체험의 기회를 확대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현재 재직하고 있는 영어교사를 재교육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영어만 된다고 아무나 채용할 수도 없다. 영어교사의 역할을 능력에 따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 읽기나 문법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와 영어회화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로 나누어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영어교육은 나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어 사교육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교육은 점수 경쟁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고 남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하는 것이다. 경연대회와 같은 입시 체제에서는 영어는 물론 다른 사교육을 줄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