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강인선 논설위원이 쓴 <부토 암살이 ‘남의 일’ 아닌 이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지난주 암살됐다. 파키스탄은 내년 1월 선거 실시 여부가 불확실할 정도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운명의 딸’ 부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버드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며 스포츠카를 타고 유럽을 누비던 대통령의 딸은 아버지가 쿠데타 세력에 처형되자 정치에 뛰어들었다. 두 번 총리에 당선됐지만 매번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부토는 파키스탄 서민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를 자처했지만, 외국의 투자 인허가 업무를 쥐고 있던 남편의 별명은 ‘미스터 10퍼센트’였다. 부토는 정치적 음해라고 주장했지만, 스위스 등 외국은행엔 이들 부부가 국고에서 빼돌린 돈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서구 언론들은 파키스탄이란 나라가 안고 있는 모순과 폭력성, 비극과 복잡함이 부토의 삶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너무나 먼 나라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오늘날 우리 안보를 위협하는 북핵위기엔 파키스탄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파키스탄은 1998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부토가 총리직을 떠난 지 2년 후였다. 그동안 부토는 1989년 워싱턴에서 중앙정보국(CIA)의 보고를 듣기 전까지는 군부가 핵개발을 추진 중인지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군부가 총리에게조차 비밀로 했다는 것이다. 부토는 핵개발의 주역인 칸 박사가 핵기술을 북한이나 리비아에 팔아넘긴 사실도 몰랐다고 했다. 그러나 1994년 부토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미사일 설계도를 부토에게 건네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키스탄은 인구 1억6000만 명의 세계 2위 무슬림 대국이다. 여전히 무법천지인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이라크도 지척인 이 덩치 큰 나라가 예측불허의 혼란에 빠지자 국제사회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21세기 최악의 안보위협 요인인 테러, 핵, 종교가 모두 개입돼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테러로 정치불안에 빠지는 것은 오늘날 국제사회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악몽 중 하나다. 미국 언론들이 수시로 “파키스탄 핵무기는 군부 손에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고 전하는 것도 바로 이런 불안 때문이다.

    무샤라프 현 대통령과 부토의 권력분점을 중개했던 미국으로선 파키스탄 정국 안정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키스탄이 핵을 가진 실패한 국가가 돼 테러의 온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내년 초엔 미국 대선의 막이 오르고 임기 말 정부는 부담스러운 일을 시도하기 어렵다. 이 관심과 힘의 공백이 파키스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가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라크 파병 문제로 국론이 분열될 정도로 논란을 벌인 것도 9·11 테러로 인해 달라진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주한미군 규모가 축소되고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가 결정된 것도 테러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전략적 유연성을 높이겠다는 미군의 전략변화가 배경이었다. 북핵문제 진전과정도 우리의 의도나 노력보단 외부의 영향에 더 많이 좌우됐다.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가 처한 환경은 국제문제에 대한 높은 이해와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영어를 배우고 해외여행을 하는 데 들이는 노력과 돈의 반의 반만이라도 국제문제를 보는 안목을 높이는 데 투자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토 암살 사건 역시 한 유명 정치인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화제 삼고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거기서 시작된 국제정세 변화가 언젠가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