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6> 사명


    “‘너도 천사를 믿어라.’를 영어 ‘Believe angel!’로 변환시킬 생각을 하시다니. 거기다 숨겨진 대여금고의 비밀번호 ‘0075’까지 찾아내시고요.”
    “이래서 팀장님과 함께 있으면 롤러코스트를 탄 기분이 든다니까요. 충격과 공포가 끊임없이 휘몰아치잖아요.”
    “비밀자금관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따라서 그건 리재경이 공격적으로 조세회피와 위장을 전담하던 치밀하고 지능적인 개발자란 증거고.”
    “개발자요? 무슨 게임개발자도 아니고.”
    “탈세자의 역외탈세계획을 도와주는 프로모터(조력자)란 소리야. 그런데 비밀자금관리도 지능적인 역외탈세자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해. 첫째는 방금 말한 프로모터고, 둘째는 고액자산가,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역외탈세를 유도할 목적으로 고액재산가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설득하는 프로모션이야. 여기서의 프로모션은 당연히 금융기관이겠지.”
    “그럼 고액자산가는 북한의 김씨 일가고, 프로모터는 당연히 리재경이겠네요.”
    “맞아. 그래서 처음엔 프로모션 역시 예치가 가능한 금융기관일 것이라고 예상했어.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를 꼬이게 만든 출발점이야.”
    “리재경이 또 한 번 교묘하게 트릭을 걸어놓았군요?”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은폐가 목적인 비밀자금을 은닉·관리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점이 리재경의 고민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금융실명제로 인해 프로모션이 존재할 수 없다는 거죠?”
    “때문에 리재경은 금융기관을 프로모션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대여금고를 선택한 거야.”
    “그렇다면 리재경이 왜 하필 재팬리스에 외국자본을 가장해 투자한 것일까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야. 첫째는 완벽한 위장. 재팬리스는 합작펀드 형태라 자금의 운용과 관리에 있어서 한·일 양국 모두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는 없어. 즉 그 한계를 약점으로 이용하면 보다 안전한 비밀자금의 은닉·관리가 가능하지.”
    “아주 지능적인 수법이군요.”
    “놀라운 사실은 마에다 유주루도 이미 자금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투자자금이 비밀통치자금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투자자금의 주체와 운용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아주 커.”
    “아니 비밀자금의 실체를 파악했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시죠?”
    “이미 확인했거든.”
    “예~에? 언제, 어떻게 말입니까?”
    “그것도 마에다 유주루의 입을 통해 직접. 2차 접촉 당시 도청장치를 노출시키자마자 곧바로 반응이 나타나더군.”
    “어떤 반응이었죠?”
    “카리브해연안의 조세피난처에 있는 금융투자신탁회사를 통해 재팬리스에 투자된 자금이 있다는 거야. 그런데 아무래도 이 금융투자신탁회사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명목회사, 일명 페이퍼컴퍼니 같다더군.”
    “그럼 마에다 유주루에게서 그 금융투자신탁회사의 은밀한 내사를 청탁받은 겁니까?”
    “그래. 자기도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했어. 물론 민간인 신분이라는 건 거짓말이지. 아무튼 일본 나이조우는 비밀자금 추적에 실패한 거야. 그 과정에서 겨우 알아낸 것이 페이퍼컴퍼니에 투자한 자금이 필리핀에서 흘러들어왔다는 정황이고. 그래서 인터폴로 위장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였어.”
    “그럼 팀장님의 대답은 뭐였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야마구치구미의 네트워크를 활용하게 해달라고.”
    “가만! 그건 국내로 밀수된 마약을 이용해 마에다 유주루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핑계로 요구한 게 아니었나요?”
    “물론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야마구치구미의 네트워크를 활용하게 되면 마에다 유주루의 감시와 통제하에 놓이게 되잖아. 그것은 곧 마에다 유주루를 기만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거든.”
    “그게 2차 접촉에서 신뢰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됐군요.”
    “세상에! 팀장님은 상식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 같아요.”
    “그럼, 리재경이 재팬리스에 투자한 두 번째 이유는 뭐죠?”
    “복수와 암시야. 만일의 경우 비밀자금이 우리 과세 당국에 발각되면 그 자금의 관리주체와 성격을 노출시키기 위한 장치였다고나 할까. 더불어 비밀자금이 다시 해외계좌로 빠져나가는 것도 막을 수 있고.”
    “정말 대단한 두뇌네요! 최후에는 리재경이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나 큰 다테노카이의 유령 마에다 유주루를 잡아먹으려는 계획까지 꾸몄군요.”
    “그런데 팀장님, 교차로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요.”
    “그러게,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차들이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안 하네.”
    “혹시 교통사고가 난 건 아닐까요?”
    “어디, 한 번 볼까. 사고가 났으면 TV뉴스에서 속보가 뜨겠지.”


    [속보를 다시 한 번 전해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국민은행 ◯◯지점에 자동소총으로 중무장한 2인조 강도가 침입해 고객과 은행직원을 인질로 잡고 현금을 강탈하는 초유의 강도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강도들은 등산복 차림의 남녀 노인 2인조로 20대 여직원 한 명을 인질로 삼아 이미 범행현장을 벗어난 상태입니다.]
    “왜 하필 국민은행 ◯◯
    [생존자의 진술에 의하면 강도는 고객과 직원들을 점장방에 가두고 자동소총으로 무차별 난사까지 했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희생자는 모두 15명입니다. 생존자들 또한 총상을 입어 부상 정도가 상당히 심각한 상태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군·경은 강도들이 찍힌 CCTV 자료를 확보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강도들이 사전에 치밀한 모의를 한 듯 CCTV를 파괴하고 범행을 저질렀답니다. 현재 군과 경찰은 강도의 예상도주로마다 임시검문소를 설치하고 검문검색의 강화를 위해 인력을 배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강도들이 아주 대담하면서도 지능적인 전문가들처럼 보여. 가만! 그럼 혹시?”
    “!”
    [지금 다시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주차장에 있던 차량 2대가 도난당한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그래서 군·경은 무장괴한들이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각자 차량을 나누어 타고 도주 중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은 교통정보입니다. 현재 남산 1호 터널에서 소형 차량에 의한 추돌사고가 발생해 극심한 교통정체가 빚어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명동에서 한남대교 방향으로 달리는 차량들을 운전 중이시라면 가까운 곳에서 우회하시기 바랍니다.]
    “재국 씨, 군·경 종합상황실에 연락해서 용의자로 의심되는 차량이 있나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도망치는 사람과 그들을 쫓는 사람. 상식적인 경우라면 쫓기는 사람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초긴장상태에 놓인다. 하지만 피오기와 홍화는 의학적인 예상 범주에 들지 않았다. 피오기와 홍화는 오랜 시간 반복적인 군사훈련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생리적인 긴장상태에 익숙해져 있었다. 물론 본인들이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때문에 피오기와 홍화는 북한 주민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는 말과 달리 다른 사람의 소망, 고통, 권리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었다. 아무튼 피오기와 홍화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교활한 범죄인의 심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정원은 본능적으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팀장님, 은행여직원이 발견됐습니다.”
    “발견지점은?”
    “남산 1호 터널입니다.”
    “남산 1호 터널?”
    “예, 방금 전 뉴스에 나온 차량추돌 가해자가 바로 그 여직원입니다. 그런데 난처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여직원이 자살폭탄테러범처럼 급조폭발물로 제작한 폭탄조끼를 입고 있답니다.”
    “세상에! 무차별 난사에 폭탄조끼까지.”
    “일단 현장의 경찰관에게 터널 안의 시민들부터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해. 기자들의 접근도 철저히 차단시키고.”
    “알겠습니다.”
    “아니, 팀장님. 왜 갑자기 차를 돌리세요. 대여금고는 어떻게 하고요?”
    “예감이 안 좋아. 아무래도 국민은행에 침입한 은행강도는 단순 강도가 아닌 것 같아.”
    “그럼요?”
    “아마도 우리와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감정보다는 결과를 의식해 총기에 호소했고.”
    “그렇다면 그건…….”
    “일단 서두르자고. 우리에게 월급을 주는 국민이 지금 위험에 처한 상황이잖아.”
    “그렇다고 우리들이 가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아요. 폭발물 처리는 처리반에 맡기는 편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요?”
    “당연하지. 하지만 폭탄조끼의 제작수준을 확인하면 내 예상이 맞는지 틀린지 금방 알 수 있잖아.”
    정원은 을지로 2가의 교차로에서 급히 차를 돌렸다. 그나마 정원 일행이 남산 1호 터널 근처에 있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현장은 경찰통제선이 설치되고 교통통제와 민간인의 접근이 철저히 차단됐다. 폭발로 인해 차량화재가 발생할 것에 대비해 소방차 10여 대도 출동해 있었다. 그런데 통제선 밖에서 경찰관들을 지휘하던 총경이 정원의 신분을 확인하자 대뜸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폭탄조끼에 달린 금속타이머(시한장치)가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경과한 시간을 제외하면 남은 시간은 20분 남짓이었다. 총경은 제시간에 폭발물처리반이 도착하지 않으면 폭파에 따른 피해가 상당할 거라고 안절부절했다. 순간 정원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그러곤 두꺼운 경찰벽을 뚫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경찰통제선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순간 재국이 황급히 뛰어와 뒤에서 정원의 재킷을 잡아당겼다.
    “팀장님, 이건 애초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까?”
    “후후후, 괜찮아.”
    “우리는 이론교육을 받은 게 전부입니다.”
    “알아. 아직까지는 현장경험이 전무하지.”
    “게다가 폭발물 제거 시 안전을 위해 입는 방폭복도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무섭지. 하지만 상대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야. 그들의 행동패턴은 중요한 사회적 기준과 룰을 반복적이고 또 지속적으로 위반하는 거고. 그리고 시간이 얼마 없어. 그건 지금 당장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고.”
    “팀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비현실적입니다.”
    “절대 모험이 아니야.”
    “그럼 뭐죠?”
    “우리가 선택한 운명이고 국가와 국민이 맡긴 사명이야. 때문에 지금 재국 씨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간절한 기도야.”
    “팀장님, 정말 저 죽음의 구역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제아무리 벼랑 끝 상황일지라도 해결책은 반드시 있어. 흥분해 서두르다 그것을 찾지 못할 뿐이지. 목적이 분명하니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야. 꼭.”
    “물론 전 팀장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으니까요. 하지만 유진이가 저렇게 쳐다보고 있는데요?”
    “아마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유진 씨가 더 실망할 걸. 그리고 재국 씨, 난 보여.”
    “뭐가 말입니까?”
    “재국 씨의 눈빛이 지금 내게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거. 아마 내가 들어가지 않으면 재국 씨가 뛰어들 것 같은데, 아닌가?”
    “!”
    “손에 들고 있는 거나 어서 줘. 그리고 재국 씨가 결혼한다는 소식 외에는 나한테 휴대전화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팀장님. 그럼 조심하십시오.”
    정원이 재국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쳤다. 그리곤 주저 없이 터널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연한 눈빛의 정원도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유진이었다. 오히려 애써 외면하기까지 했다. 터널 안은 입구부터 편도 2차로가 중고차시장을 방불케 했다. 긴급상황 때문에 시민 1,000여 명이 버리고 간 차량들이었다. 정원이 터널 특유의 오렌지 불빛 속을 500m쯤 들어가자 문제의 노란색 소형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소형 차량은 앞 차량을 추돌하고, 터널공동구에서 2차 충돌을 해 범퍼 한쪽이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다. 거기다 우측 타이어가 터널공동구의 배수로에 걸려 차체도 30도 정도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무사하셨군요?”
    “아, 예.”
    “아가씨, 움직일 수는 있겠습니까?”
    “이마의 타박상 외에 특별히 다친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전 아가씨를 도와주려고 온 경찰입니다.”
    “그럼 얼른 제 앞의 차량부터 치워주세요. 전 계속 달려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입고 있는 이 폭탄조끼를 폭파시킨다고 했어요. 그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우선 심호흡을 깊게 하십시오.”
    “!”
    “어서요! 그런 다음 천천히 내쉬세요.”
    “휴~우!”
    “좋습니다. 다시 한 번 똑같이 해보세요.”
    “휴~우! 이제 됐나요?”
    “예, 아주 좋습니다.”
    “차는 언제 치워주실 거죠. 전 시간이 없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예?”
    “이제 제가 그 폭탄조끼를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그 폭탄조끼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반듯하게 세워주십시오.”
    “이 정도면 됐나요?”
    “예, 됐습니다. 전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합니다. 이건 제 경험상 아주 단순하고 조잡한 폭탄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아가씨는 제가 폭탄조끼를 처리하는 동안 제 지시에 철저히 따르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좋습니다. 이제 저를 믿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세요. 그런 다음 제가 폭탄조끼를 처리할 수 있도록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세요.”
    “이렇게요?”
    “예, 잘 하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폭탄조끼를 살펴보겠습니다.”
    정원은 폭탄조끼를 살펴보자마자 극도의 긴장과 공포를 마주했다. 폭탄조끼에 설치된 폭약은 수류탄 한 개 정도의 위력을 가진 0.6파운드짜리 C(Composition)-4였다. 그런데 그 C-4가 전면에 여섯 개나 나란히 연결돼 있었다. 그리고 그 폭약을 폭파시키기 위해 시한장치인 금속타이머까지 장착해놓았다.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폭탄에 부착돼 있는 중계스위치였다. 중계스위치는 근거리에서는 발파기와 단파리모컨을 사용하고, 원거리에서는 휴대전화를 이용해 점화할 수 있는 2중 폭파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폭탄조끼를 만든 상대가 고도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혹시, 남자친구나 애인 있으세요?”
    “남자친구나 애인요?”
    “예, 설마 예쁜 아가씨가 아직 없다는 거짓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
    “그게 저, 솔직히 애인은 없고 평범한 남자친구는 한 명 있어요.”
    “뭐 하시는 분인가요?”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요.”
    “아주 훌륭한 분을 남자친구로 두셨군요. 그럼, 그분의 어디가 아가씨의 마음에 들던가요?”
    “없어요.”
    “!”
    “단 한군데도. 키도 작고 얼굴도 그저 그렇고. 거기다 집에 재산까지 없어요. 그렇다고 나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럼 안 만나면 되잖아요. 세상에 멋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저도 정상은 아니에요. 그쵸, 경찰 아저씨?”
    “…….”
    “그런데 정말 웃긴 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머리가 먼저 반응을 하는데 그 오빠를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을 보여요. 그래서 괜히 얌전하고 순진한 척하고 또 내숭도 떨게 되고요.”
    “그럼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러세요?”
    “당연하죠. 제가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요. 168cm의 키에 남들 다 하는 공사를 몇 군데 하긴 했지만 그래도 뛰어난 미모까지…….”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또 발생했다. 여직원의 몸에서 폭탄조끼를 제거하려던 정원의 당초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허리라인을 따라 설치된 3개의 버클이 아무리 만져도 좀처럼 고리에서 빠지지 않았다. 손쉽게 풀 수 있는 일반적인 버클이 아니었다. 인질이 폭탄조끼를 벗고 탈출할 수 없도록 특수 제작한 버클이었다. 침착하게 냉정을 유지하던 정원은 당황했다. 본능적으로 시계를 내려다보니 남은 시간은 겨우 10분 남짓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때 재국이 건네준 소형 폴딩나이프(접이식 칼)가 떠올랐다.
    “제아무리 벼랑 끝 상황일지라도 해결책은 반드시 있어. 단지 흥분해 서두르다 그것을 찾지 못할 뿐이야. 그래, 난 찾을 수 있어.”
    “경찰 아저씨, 갑자기 왜 그러시죠. 혹시 폭탄제거를 포기하신 건가요?”
    “내가 포기할까 봐 두렵습니까?”
    “솔직히 조금은요.”
    “앞서도 말했다시피 저는 전문가입니다. 불발탄·유기탄·매몰탄·불량탄 등 각종 폭발물을 지금까지 수도 없이 제거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가장 먼저 투입된 것이고요. 그러니까 무조건 절 믿으셔야 합니다.”
    “예, 알겠어요.”
    “불신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선 폭탄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시고요.”
    “죄송합니다. 전 단지…….”
    “괜찮습니다. 그럼 이제 폭탄 속을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정원은 차선책으로 금속타이머가 달린 케이스의 나사를 풀었다. 사실 급조폭발물은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제작되지만 대부분 주장약·기폭장치·케이스라는 공통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폭발을 유도하는 핵심적인 메커니즘은 케이스 안에 설치한다. 하지만 막상 내부를 확인한 정원은 다시 한 번 경악했다. 이론과 실제가 극명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간혹 영화에서는 나사를 풀고 파랑선 아니면 빨강선 둘 중 하나의 전선을 자르면 그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정원과 마주한 폭탄은 내부의 전선부터가 여러 가닥이었다. 거기다 모든 전선이 검은색으로 동일했다. 따라서 영화처럼 색상으로 구분해 그중 하나를 절단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흠, 제작자의 잔인성을 봤으니 이제는 공격성도 볼까.”
    그때 정원의 머리에 떠오른 교육내용이 있었다. 여러 개의 전선 중 전원과 연결된 접지선을 찾으라는 내용이었다. 정원은 곧바로 접지선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도 포기하고 말았다. 급조폭발물 제작전문가는 그것까지 예상하고 모든 전선을 정교하고 복잡하게 전원과 연결시켜놓았다. 물론 시간이 충분하다면 찾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5분 안에 폭발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접지선을 찾아낸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결국 정원은 자신의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제 폭탄조끼를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제가 뭘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제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우선 마음을 강하게 먹으세요. 그리고 제가 하는 말만 따라서 외치기만 하면 됩니다. 간절한 기도문처럼 말이에요.”
    “전 그냥 똑같이 외치기만 하면 되나요?”
    “물론입니다.”
    “예, 알겠어요.”
    “그리고 제가 뛰라고 소리치면 무조건 터널 입구 쪽을 향해서 달리세요. 알았죠?”
    “예, 달리기는 자신 있어요. 중학교 때 100m 육상선수였거든요.”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준비됐어요.”
    “폭탄은 유령이다.”
    “폭탄은 유령이다.”
    “그래서 두려워하면 우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두려워하면 우리를 지배한다.”
    “난 아무리 겁을 주어도 무섭지 않다.”
    “난 아무리 겁을 주어도 무섭지 않다.”
    “좋습니다.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좋습니다.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하나.”
    “하나.”
    “둘.”
    “둘.”
    “넌 절대 나를 잡아둘 수 없다.”
    “넌 절대 나를 잡아둘 수 없다.”
    “셋!”
    “셋!”
    “달려요, 어서!”
    “아, 예.”
    정원이 선택한 방법은 너무나 단순해서 황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유치한 생각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반전을 만들어냈다. 정원은 재국이 건네준 폴딩나이프의 등 쪽 톱날로 폭탄조끼의 뒷면을 세로로 거칠게 찢기 시작했다. 그런데 급조폭발물 제작전문가도 거기까지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게 분명했다. 정원은 황급히 여직원의 몸에서 폭탄조끼를 벗겨내 곧바로 차량 안으로 던졌다. 그리곤 차문을 닫자마자 여직원의 손을 잡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미친 듯이 내달렸을까. 저 멀리 아득하게 점으로 보이던 터널 입구가 마침내 그 형태를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쾅!”
    순간 강렬한 불빛과 함께 엄청난 굉음을 내며 화염에 휩싸인 여직원의 차량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코르크마개가 열려 내부의 압력이 폭발한 샴페인 같았다. 그 충격으로 달리던 정원과 여직원이 총알처럼 앞으로 튕겨나갔다. 뒤이어 시커먼 연기가 단숨에 몰려와 정원과 여직원을 덮쳤다. 터널 입구를 불과 100m쯤 남겨둔 지점이었다. 순식간에 터널 안과 밖은 공습을 받은 항공모함처럼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시설물이 넘어지고 차량들은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찰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유진과 재국도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얼마 후, 차량의 수평선 아래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괜찮습니까?”
    “으으으, 괜찮아요. 그런데 생각할수록 정말 나쁜 사람들이네요.”
    “!”
    “살려준다고 약속을 해놓고 폭탄조끼를……. 아마 대여금고에 아무것도 없어서 무장강도들이 저에게 분풀이를 한 걸 거예요.”
    “대여금고라고요?”
    “예, 무장강도들은 처음부터 현금이 아니라 대여금고의 보관물을 노렸어요.”
    “혹시 그 대여금고가 이 번호 맞습니까?”
    “아, 맞아요. 그 번호의 대여금고였어요.”
    “역시 그랬군. 그런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정확히 말씀드리면 아무것도 없었던 건 아니에요. 책이 한 권 들어 있었거든요.”
    “책이라고요?”
    “예, 그것도 서머셋 모옴의 단편집으로요. 그런데 강도가 책속에 꽂힌 메모를 읽고는 무척 화를 냈어요.”
    “그렇다면 누군가 비밀자금을 이미 인출했다는 소린데 누가 그런 대담한 짓을…….”
    “팀장님! 괜찮으세요?”
    “어, 유진 씨. 괜찮아.”
    “경찰 아저씨, 혹시 애인인가요. 애인 맞죠. 그렇죠?”
    “…….”
    “에구, 누구는 좋겠다! 애인이 짱 멋있어서.”
    그 시각 피오기와 홍화는 은행에서 강탈한 차량을 버리고 은혁의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은혁은 시민들의 혼란 정도와 군·경의 검문검색 그리고 정확한 상황파악을 위해 DMB를 켰다. 그러자 곧바로 남산 1호 터널에서 발생한 차량화재사고와 관련된 뉴스속보가 떴다. 세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뉴스속보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피오기와 홍화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이유가 취재영상으로 설명됐다. 바로 정원이었다. 순간 피오기는 자신의 심장에 정원이 쏜 총알이 박힌 것 같았다. 피오기는 무의식적으로 어금니를 되게 맞비볐다. 그리고 뼈를 통째로 씹어 가루로 만드는 소리를 냈다.
    “우리의 위대한 조국과 인민들은 남조선의 하찮은 적을 제물로 원하지 않겠지?”
    “당연하죠. 남조선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가장 고귀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녔으며 가장 능력 있는 적을 원할 거예요.”
    “맞소. 내가 반드시 저 남조선 반동의 심장을 인민들에게 선물로 바치겠소. 빠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