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황순현 인터넷뉴스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 달이 1년 같은 IT(정보기술) 세상에는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이겠지만, 9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는 워드프로세서의 군웅할거(群雄割據) 시대가 있었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는 이찬진 사장이 ‘아래아 한글’로 대성공을 거두자,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워드프로세서 개발에 일제히 뛰어들었다. 파피루스·사임당·한글아미프로·글사랑·아리랑 등 지금은 이름마저 가물거리는 국내외 워드프로세서들이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각축전을 벌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결과는 참담했다. ‘워드’(마이크로소프트)와 ‘아래아한글’만 겨우 살아남고, 워드프로세서 시장 자체가 공멸(共滅)했다.

    시곗바늘을 올해 초로 돌려 보자. 대부분의 인터넷 업체들이 UCC(user-created contents·사용자 제작 콘텐츠)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다. 더구나 “올해 대선 결과는 인터넷 UCC가 가를 것”이라는 말까지 돌면서, 수많은 업체들이 UCC 동영상 시장에 진출하거나 서비스를 강화했다. 속단(速斷)은 이르지만 지금 난립해 있는 수십 개의 UCC 사이트 중에서 돈을 벌면서 승전고를 울리는 기업은 아직 없다. 게다가 UCC가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증거도 찾기 힘들다. 획기적인 반전이 없다면 불법 저작물, 비싼 네트워크 요금, 수준 미달 콘텐츠 범람 등 삼중고에 시달리는 UCC 사이트는 일시적 유행(fad)에 그칠지 모른다.

    90년대 초나 지금이나 한국 인터넷 산업을 멍들게 하는 것은 베끼기 광풍(狂風)이다. 조금 유망하다고 소문이 나면, 너나없이 그 사업에 뛰어들고 본다. 남의 아이디어를 마치 내 것인 양 베끼는 파렴치 행위도 횡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최근 미국에서는 ‘트위터(Twitter)’라는 서비스가 유행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 네티즌들이 한 줄짜리 간략한 느낌을 적는 블로그다. 이게 미국에서 뜨니까, 국내에서는 7~8개의 유사 서비스들이 ‘마이크로 블로그’라는 이름으로 난립하고 있다. 여기에는 국내 굴지의 이동통신 기업까지 채신머리없이 기웃거리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마이스페이스·페이스북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가 큰 인기를 끌자, 너나없이 뛰어들어 10여 개의 서비스가 난립하고 있다. 또 메타블로그(다양한 블로그 서비스를 엮어 주는 서비스)가 뜬다고 하니, 역시 10개가 넘는 메타블로그 서비스가 난무하고 있다.

    지금 한국 인터넷 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한때 한국의 선두 벤처기업들이 만든 MMORPG(다중접속 온라인게임)나 싸이월드, 지식인 같은 서비스는 세계 인터넷 업체들의 벤치마킹(benchmarking·경영전략 등의 장점을 배우는 것)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터넷 혁신 기술의 개발은 곧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해외 사업 부진, 네이버·다음으로의 쏠림 현상 등 위험 시그널들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자랑했던 초고속 인터넷망 인프라도 이미 일본 등에 추월당했다. 혁신적인 기술(disruptive technology) 개발 대신, 베끼기에 골몰하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인터넷 후진국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한국 인터넷 산업의 조종(弔鐘)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