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스타전 이후 인대 손상.."야구인생 추락"'차세대 에이스' 기대 한 몸에..부상 여파 2군 무대 전전
  • "그때 등판하지 않았다면 조성민의 야구인생은 달라졌을 것."

    한-일 프로야구에서 명투수로 활약했던 조성민이 지난 6일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충격적인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는 물론, 일본 언론에서도 관련 사실을 대서특필하며 조성민의 불운했던 야구인생을 집중 조명하는 모습이다.

    조성민은 1996년 고려대를 졸업, 계약금 1억5천만엔을 받고 일본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직행했다. 194㎝의 큰 키에 귀공자 같은 외모를 지닌 조성민은 당시 국내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모두의 관심 속에 1998년부터 선발로 나서 다승 공동 1위에 오르는 등 두각을 나타냈던 조성민은 그해 '올스타전'을 끝으로 급격한 난조에 빠져들었다.

  • 9회 1사후 코칭스태프에게 "교체해 달라" 부탁
    곤도 히로시 "이 놈이 뭐라고 하는 거야?" 묵살

    일본 ‘석간 후지’는 "조성민이 98년 올스타전에서 무리한 투구를 하지 않았다면 그의 나머지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당시 입었던 부상이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고교-대학시절 혹사를 당했던 조성민은 요미우리 입단 첫 해인 1997년에는 '몸 만들기'에만 주력했다.

    테스트 차원에서 하반기 1군 경기에 데뷔한 조성민은 22경기에서 1승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예상대로 '대어'를 낚았음을 확신한 요미우리는 그때부터 조성민을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언론에 조성민에 대한 홍보 자료를 보내 그의 기사가 연일 지면을 장식토록 했고, 이듬해에는 당당히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시키는 승부수를 띄웠다.

    이같은 전략은 들어맞았다.
    스타기질이 있던 조성민은 주위의 기대와 관심이 높아질수록 더욱 힘을 내는 스타일이었다.
    전반기 15경기 나선 조성민은 7승6패 평균자책점 2.75를 기록했다.
    이 중 '완투'는 6번, '완봉승'은 3번이나 기록했다.
    사실상 에이스나 다름없는 활약이었다.

  • 인대 손상으로 야구인생 추락…2군 무대 전전
    2005년 한화로 복귀, 3승4패 4홀드 초라한 성적

    눈부신 활약으로 '올스타'에 선발된 조성민은 1998년 7월 21일, 올스타전 두 번째 경기에 등판했다.
    8회부터 센트럴리그 5번째 투수로 등장한 조성민은 9회 1사후 오른쪽 팔꿈치에 이상을 느꼈다.

    조성민은 훗날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공을 던지는데 갑자기 '뚝'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어요.
    뭔가 고장이 났다 싶었죠.
    당연히 투수코치를 맡고 있던 곤도 히로시 요코하마 감독에게 제 상태를 설명해줬죠.
    더 이상은 던지기 힘들다구요."

    ‘석간 후지’에 따르면 당시 조성민은 "팔꿈치가 아프다. 교대하고 싶다"고 일본어로 말했지만, 곤도 감독은 "이 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라고 불같이 화를 낸 뒤 그를 억지로 등판시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경기에서 투수를 모두 소진했던 센트럴리그는 소방수 사사키 가즈히로를 아끼기 위해 조성민에게 무리한 투구를 강요했고, 결국 조성민은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조성민은 1999년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고 '부상'과의 기나긴 싸움을 벌였으나 끝내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 ▲ 지난 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예배를 마친 뒤 영정을 안고 나오는 故 조성민 유가족 일동.
    ▲ 지난 8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 예배를 마친 뒤 영정을 안고 나오는 故 조성민 유가족 일동.

    황금의 92학번 중 'NO.1'…"'최고투수' 기대 한 몸에"
    "고교-대학시절, 박찬호·임선동보다 한수 위" 평가

    2000년과 2002년 1~2승을 거두는데 그친 조성민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2002시즌이 끝난 뒤 옷을 벗었다.

    이후 국내 프로야구의 문을 두드렸지만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온 그를 환영하는 구단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제빵사업가·야구해설가 등 야구 외 '다른 길'을 모색하던 조성민은 2005년 한화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다시 현역 선수로 복귀했다.

    그러나 수년간 공을 만지지 않았던 탓에 성적은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3년간 3승4패 4홀드 평균자책점 5.09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기고 조성민은 또 다시 야구계를 떠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톱스타 최진실과의 결혼과 이혼, 최진실-최진영 남매의 자살 등 '비극적인 가정사'는 그를 점점 더 나락으로 몰고 갔고, 조성민도 결국엔 이들을 따라 세상을 하직했다.

    조성민의 인생은 올스타전 전·후로 극명하게 명암이 엇갈린다.
    한때 최고 투수의 반열에 올랐던 그였지만 팔꿈치 부상 이후 처참하게 바닥을 기는 삶을 살았다.

    그때 만약 곤도 감독이 조성민의 등판을 막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조광형 기자 ckh@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