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에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부 교수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50일도 남지 않은 지금 한나라당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헷갈린다. 한나라당 경선 때부터 여권 측에서 이명박 후보는 ‘한방’이면 떨어진다고 끊임없이 네거티브 공세를 취해 왔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이 ‘한방론’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 측이 범여권이 아니라 다름 아닌 야당, 즉 자기 진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이회창 전 총재가 정계에 처음 입문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대쪽 이미지에 끌렸다. 그가 기성 정치인들과는 달리 정치적 계산이나 타협과는 거리가 멀고, 원칙과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대선 정국에서 이 전 총재의 출마설이 뜨거운 이슈로 급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본인은 정권교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순수한 애국심에서 고뇌하고 있노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이 순수성을 인정받기에는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 전 총재는 지난해 말 대선 패배 뒤 4년 만에 처음으로 참석한 당 행사에서 대북정책 등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같은 행보는 그의 대선 재도전설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경선에 이 전 총재는 참여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가 공식적으로 결정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이 전 총재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적이 없다. 물론 이 전 총재가 이명박 후보를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총재와 대선 후보를 지낸 당의 원로로서 공식적으로 선출된 대선후보에게 덕담 한마디 해 주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전 총재는 요즘 기회 있을 때마다 “정권교체를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문제는 구심점을 누구로 하느냐다. 한나라당 유력 후보는 지지율 추락의 가능성이 크니 국민의 불안감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이 준비를 하는 것이 진정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항변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 전 총재가 네거티브로 패한 지난 두 번의 대선에 대한 아쉬움이 큰 만큼 명예회복의 기회를 열망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가 간다. 하지만 만일 이 전 총재가 내심 이명박 후보의 낙마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진다면 이는 ‘대쪽 이회창’을 기억하는 국민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는 것이 된다. 이 전 총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가 분명한 입장 표명을 유보하고 있는 동안 게도 구럭도 다 잃고 국민들에게 노추(老醜)한 모습으로만 각인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경선 후 한나라당과 통합신당의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한나라당에서 정권교체를 부르짖던 손학규 전 도지사는 이제 정권연장을 외치며 정동영 후보에게 충성을 다짐했다. 꽤나 속을 썩일 것 같았던 이해찬 후보도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10년 정권에 대한 위기의식이 그들을 결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경우 과열경선으로 그 후유증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가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새삼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출마설이 한나라당의 내부갈등을 촉발시켜 지지층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만일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이 20~30%를 밑돌고 대선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었다면 과연 이 전 총재의 출마설이 제기되었을까. 정권교체를 위해 힘을 합치자는 그의 열변이 혹시라도 진정한 애국심이 아닌 두 차례 대선 패배의 한풀이를 하기 위한 이기심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이 전 총재에게 주어진 일은 공식적으로 선출된 대선후보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당 원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