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럴드경제 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유근석 산업1부장이 쓴 칼럼 '배신의 계절, 불신의 시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7대 대선을 50여일 앞두고 증폭되고 있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 재출마설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거취를 분명히 하지 않는 이 전 총재의 행보에 각종 관측이 더해지면서 그의 출마 여부는 대선정국의 최대 변수가 돼버렸다. 50% 가까운 지지율을 보이고 있더라도,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진영에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 전 총재의 침묵과 장고가 길어지고, 또 깊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대선 출마설이 언론에 불거진 지 10여일이 지나도록 “아직은 말씀드릴 게 없다”며 결론을 내놓지 않는 이 전 총재의 묘한 처신은 오해와 불신을 낳는다. 

    2002년 대선 때, 결국 거짓으로 드러난 ‘병풍’에 휘말려 대권을 놓친 이 전 총재가 꿈을 다시 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름대로 명분을 축적한 뒤, 결국 제3의 후보로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1987년 11월 군사독재정권 교체라는 국민적 여망을 저버리고 맞대결을 선택한 DJ-YS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이 후보 측으로선 배신과 분열이라는 단어와 맞물린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 전 총재가 자신의 출마설을 제기함으로써 BBK 의혹 등 이 후보로 집중된 범여권의 공세와 관심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야권의 분열 가능성을 고조시키다 막판에 이 후보에게 힘을 몰아주면서 대선정국을 일방적으로 마무리한다는 가설이다. 범여권에선 이를 ‘이-이(이명박-이회창) 단일화 이벤트’라며 경계한다.

    이 전 총재의 대선 출마설과 함께 세간의 관심이 쏠려 있는 또 다른 이슈는 삼성을 둘러싼 ‘이상한 비자금 논란’이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에서 법무팀장까지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와 삼성 측 해명이 팽팽히 맞선다. 김씨는 삼성에 발탁돼 1997년 8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일했다. 2003년 대선 비자금 사건 때 삼성을 대신했고, 에버랜드 전환사채 관련 송사에도 깊숙이 간여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그가 왜 또 지금, 삼성과 맞대결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는지가 안개 속 진실게임을 풀어가는 한 축이다. 그가 주장하는 차명계좌는 누구 것인지, 7년 동안 삼성에서 일하면서 100억원대의 보수를 받았고 퇴직한 뒤에도 3년이나 월 2000만원씩 챙긴 사람이 하필 지금 ‘배신의 결론’을 내렸는지를 놓고 많은 말들이 오간다. 핵심 임원 출신의 돌출행동이 관리의 삼성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재계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인다. 정치권과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논란의 끝을 예측하기 어렵다.

    기자가 김용철이라는 이름 석 자를 처음 들은 것은 안기부의 불법도청자료인 ‘X파일’과 ‘삼성공화국 논쟁’이 한창이던 2005년 9월이었다. 기자는 9월 13일 아침 국회 국정감사 증인 채택 가능성이 높아진 이건희 삼성 회장이 극비리에 출국한 사실을 단독 취재했다. 공교롭게 조간신문에 삼성 법무팀장 출신인 김 변호사가 대기업에 비판적인 모 신문 행을 택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믿었던 참모의 배신과 파괴력은 삼성 논쟁의 와중에서 충분히 흥미로웠고 주목할 만했다. 폭발력이 있어 많이 아까웠지만 단독 취재한 이 회장의 출국 기사와 김씨의 ‘의아한 거취’를 함께 묶어 ‘위기의 삼성 설상가상’이라는 기사를 출고했다. 그런데 그는 그 뒤 예상과는 달리 너무도 조용했다. X파일은 물론 삼성의 속사정을 훤히 꿰고 있을 듯한 그는 공식적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2년여 만에 갑자기 돌아왔다. 이번에는 ‘양심선언’을 통해 ‘삼성의 차명계좌 비자금 의혹’을 터뜨렸다. 그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이란 조직이 갖는 해악이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며 “이 문제를 바로잡는 것이 내가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했다. 구속도 각오한다고 했다.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삼성은 김씨가 자신의 처우와 관련해 3차례 협박을 해왔다고 했다. 지난달 이후 퇴직 임직원에 대한 후속 지원 프로그램이 끊기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내온 협박편지도 갖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회유에 시달렸다고 주장한다.

    신뢰와 의리를 저버리는 행동인 배신은 본인에게는 또 다른 기회일 수 있다. 스스로 찾아낸 명분 앞에서 배신자라는 오명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불신에서 비롯되는 배신은 또 거대하고 음험한 딜, 음모를 염두에 둔 행동과도 무관치 않다.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아진 한나라당과 우리 경제를 선도하는 삼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신과 배신’의 화두가 따로 움직이는 듯하지 않은 느낌을 떨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