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5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했다. 8개 항에 걸친 이번 선언은 한반도 평화와 군사적 긴장 완화, 남북 간 경제협력 등에 대해 포괄적인 내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특히 제대로만 이행되면 분단 60여 년에 걸친 남북 간 불신과 대치의 벽을 결정적으로 허물 수 있는 사안도 있어 주목된다.

    우선 정전체제 종식을 위한 3자, 4자 정상회의의 한반도 개최를 추진키로 했다는 점이다. 물론 관련국인 미국과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남북의 정상이 만나 이런 논의를 한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정전체제에 따른 한반도 정세의 근원적인 불안상태를 처음으로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논의에서 한국을 제외하려고 했던 북한의 기존 정책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남북 경제협력도 마찬가지다. 선언은 해주 지역과 주변 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 어로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 등을 추진키로 했다. 해주와 한강하구를 연결하는 거대한 경제벨트를 조성하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또 개성~신의주 철도 등의 개·보수 등 수십 가지의 협력사업을 진행키로 했다. 선언에 명시된 대로 실행되기만 한다면 남북 모두에 실익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선언이 얼마만큼의 실행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런 획기적인 사업이 성공하려면 ‘세 가지 자본’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정치적 자본’으로 국민의 관심과 지지도다. 그런데 이 사업을 끌고가야 할 최고경영자의 지지도가 30%도 안 된다. 게다가 남은 임기는 다섯 달도 안 된다. 정치적 자본이 확보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둘째는 ‘외교적 자본’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호응을 남북이 어느 정도 얻어낼 수 있느냐의 역량이다. 그 관건은 물론 북한 핵 폐기다. 이런 점에서 북핵에 관한 이번 선언은 매우 실망스럽다. 북핵 불능화를 위한 6자회담 합의내용이 발표됐지만 매우 부실하다.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언급이 빠졌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선언문은 ‘핵 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이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한 문장으로 때웠다. 심도 있는 북핵 문제 논의를 희망했던 미국의 입장을 감안하면 외교적 자본을 확보하기도 간단치 않을 것이다.

    셋째는 ‘경제적 자본’이다. 이번 합의가 이행되려면 엄청난 자본이 들어간다. ‘남북 간 유무상통’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뿐이고 한국이 지원하는 형태가 될 게 자명하다. 그렇다면 정부 차원의 예산지원뿐만 아니라 민간 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불가피해진다. 국제자본의 북한 진출이 막히고 핵 폐기가 언제 이뤄질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기업의 본격적 투자가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결국 이번 선언은 한반도 평화와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해 남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겉모양만 화려했지 그 실행을 위해선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음도 보여주었다. 북방한계선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11월 국방장관 회담으로 넘어갔을 뿐 근원적인 해결책이 나온 것은 아니다. 납북자·국군포로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도 어불성설이다. 인권의 중요성을 그토록 내세워 온 대통령이 자국 국민의 인권에 이렇게 무심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차기 정권의 책무도 더욱 중요해졌다. 이번 합의의 대부분이 미래에 본격적으로 협의할 수밖에 없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언의 정신이나 방향 중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재검토할 것은 재검토해야 한다. 경제적 타당성, 한·미 동맹 등의 측면에서 철저한 검토 작업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