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박은주 엔터테인먼트 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4일 남북 두 정상이 서명한 ‘남북관계발전 평화번영선언’으로 비행기 타고 백두산 관광할 기회가 생겼다. 경의선 타고 평양에 갈 가능성도 구체화됐으며, 꽃게잡이를 할 어장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도 한다.

    큰 경사다. 미디어들은 이 소식으로 들끓고 있지만, ‘민간인’들 반응은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엊그제 후배 기자와 통화를 하던 케이블TV 관계자는 “대통령이 곧 북한 가니까 매우 바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은 바로 대통령이 38선을 걸어서 넘어갔다는 내용이 하루종일 방송되던 날이었다.
    50년 넘는 금단의 길,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장면 같은 ‘감동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방북관련 특집보도의 시청률은 7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 방북 당시에 비해 5.8%포인트가 떨어진 14.5%였다. 당시에 존재했던 ‘이산 가족’의 인구비율이 줄어든 것으로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한 감이 있다. 대통령의 낮은 인기가 시청률 저하로 이어졌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방북부터 돌아올 때까지 2박3일간의 일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프림’과 설탕이 겉돌기 시작한 식어버린 커피 같다. 대체 왜일까.

    방송사에서 대북 방송 교류를 담당하고 있는 한 인사는 “움직일 때마다 돈, 돈 하니까, 너무 한단 생각도 듭디다”라고 털어놨다. “업무 차 북한을 다녀오면 꼭 동남아 단체 관광에서 토산품점에 끌려간 것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다”며 좋지 않은 기억을 털어놓는 이도 있다.

    남북 교류가 비교적 활발해지고 북한에 대한 지원이 늘어났지만, 그럴수록 국민들 마음속에선 ‘통일 냉담자’가 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반 통일 세력’이라면 철천지 원수처럼 대하면서도 ‘월드컵 남북 단일팀을 만들면 (우리 성적이 떨어지므로) 큰일 난다’고 반대하는 오렌지 민족주의자들의 얘기가 아니다. 북한이 싫든 좋든, “언젠간 통일이 되겠지”하고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돼 간다는 말이다. 일종의 ‘대북(對北) 피로증’이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쪽에선 끊임없이 퍼주는데 저쪽에선 끝도 없이 더 원하고, 무엇보다 그동안 준 것 때문에 발목을 잡혀서 또 퍼주게 되는 상황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 건 아닐까? 그렇게 퍼줘도, 대화단절·핵실험을 통해서 긴장을 조성하는 등 언제 ‘삐치는’ 상황을 만들지 모르는 이 상황이 이제는 정말 싫은 것이다. 처음엔 모든 세상과 절연하더라도 ‘그녀’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던 남자가, 결혼을 앞두고 여자 쪽에서 “아버지 빚 좀 갚아주지”, “우리 집 먼저 하나 사내라” 같은 지긋지긋한 ‘앵벌이’에 신물이 난 듯한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거나, 들어갈 것인지 사람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사실 협박과 화해를 반복하는 북한의 능수능란한 외교술은 군사대국 미국마저도 초긴장하게 만드는, ‘없는 자의 전략’으로서는 매우 유효한 전략이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뛰어난 외교술일지는 몰라도, 통일에 대한 열망에 지속적으로 찬비를 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북한을 이렇게 만든 건, 임기 내 ‘통일에 한 걸음 다가간 대통령’이라는 말에 집착한 역대 대통령들의 실책이고, 정치꾼 대통령들이 남긴 유산이다.

    4일의 공동선언 이후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교류와 투자는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당했다’는 느낌이 드는 투자나, ‘겉치레’에 불과한 듯한 교류는 결국 통일 무관심자, 혹은 냉담자로 만드는 행위라는 것을 북한도, 우리 측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