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의가 짓밟히면 올바른 공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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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正義)와 공의(公義)”

    '개인의 정의가 짓밟히면, 올바른 공의는 없는 것이다.'

    시민운동을 하면서 늘 부딪치며 갈등을 느끼는 부분이다. ‘탈북자강제북송 반대농성’을 하면서도 어김없이 이런 고민에 빠져든다. 농성 200일째를 맞이해서 ‘이제 할 만큼 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 간단한 말 속에는 ‘정의와 공의’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할 만큼 했다?"

    200일간 농성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탈북자강제북송 반대는 ‘종북세력’에게는 탐탁찮은 이슈다. 인터넷이 종북세력에게 장악당하고 대부분의 시민단체가 종북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탈북자강제북송 반대농성장이 엉터리민원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경찰과 농성장의 옥인교회가 그런 엉터리민원에 춤을 추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아마 이러한 점을 이해하면서 ‘이제 할 만큼 했다’며 위로했을 수도 있다. 또한 수천년의 한반도 역사 이래 중국을 향해 200여일 동안 항의와 규탄을 지속적으로 한 적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속에서 ‘이제 할 만큼 했다’는 말은 실루엣처럼 ‘공의를 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게 했다.

    "전기고문 통닭 퍼포먼스"

    우연이 한꺼번에 겹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잘 기획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 것이다. 8월 31일, 탈북자강제북송 반대농성 200일째를 맞이해서 자축(?)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함께 한 분들을 모시고 통닭을 나눠 먹기로 한 날이다.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 경찰의 과잉대응, 교회의 행사방해(전원차단) 등은 우연한 것일까? 인권운동을 한다는 선수(단체장 등)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농성장인 교회 문 앞까지 방패를 든 경찰이 도열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소위 교회라는 곳에서 행사직전에 전원을 차단해서 노골적으로 방해한 것이다. 아마 그들은 ‘공의’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한다.

    "정의냐? 공의냐?"

  • 나는 하느님이 아니다. 나는 대통령이 아니다. 나는 외교관이 아니다. 나는 정치가가 아니다. 시민운동가를 자처하는 하찮은 필자가 앞으로도 고민을 할 것이지만 ‘정의와 공의’는 뗄 수 없는 함수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은 역시 ‘정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공의는 앞서 말한 그런 사람들이 더 추구해야 할 목적이고, 경찰은 공의의 목적을 위한 집행자로, 교회는 공의로 갈등하는 위치에서, 시민단체는 공의보다는 정의를 더 앞세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찮은 필자가 고민하는 정의와 공의에 대해, 그날 ‘전기고문 통닭 퍼포먼스’ 현장의 사람들은 어떤 고민이 있었던가?

    "답은 '개인의 역할'이다."

    ‘올바른 개인의 자존’을 확립한 개개인이 사회를 구성하면 그 사회는 건강할 것이다. 그리고 그 국가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한 국가가 될 것이다. 개인이 건강하지 못하면 ‘떼거리 문화’가 성행하고 민주주의 약점인 엉터리여론에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5년 황우석 신드룸’이며, ‘2008년의 광우폭동’이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안철수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떼거리 흐름’은 개인의 자존을 세우는데 개인과 사회적, 국가적 역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북자강제북송 반대농성장은 철저히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장소인 것이다. 자유와 생명,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촛불은 개개인이 모여 함께 농성을 이어가는 곳이다. 그래서 단 한 사람이 남아도 계속되는 곳이다. 그 개인의 역할이 떼거리 문화와 한판 승부를 벌리는 곳이기도 하다.

    "개인은 '정의'를 앞세워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종북세력을 척결하는 것은 정의다. 그 정의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세력을 종북세력이라 하는 것이다. 곧 대한민국 정의를 세우기 위해 적을 척결하는 것은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 말에 부정하는 사람은 종북세력으로 봐도 무방하며, 척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간단한 논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기본적으로 밑바탕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 바탕위에 공의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8월 31일, 중국대사관 건너편 옥인교회 앞 자생초마당의 ‘전기구이 통닭 퍼포먼스’는 공의가 정의를 억압한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개인의 정의가 짓밟히면 올바른 공의는 없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는 함수관계지 대척점이 아닌 것이다.

    "중국은 학살자나 탈북자 문제보다 더 아픈 곳이 '전기고문'이다."

  • 어느 가을날, 자생초마당에서 정의와 공의에 대한 짧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