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일본의 자살」 따라 침몰하고 있다.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일본이 「자살」한다는 약 40년 전의 한 논문의 예언이 요새와서 맞아들고 있다고 일본이 떠들썩하다. 예언은 종합잡지 문게이슌쥬(文藝春秋) 1975년 2월호에 실린 글 「일본의 자살」 속에 있었다.

    바람은 고급지 아사히(朝日)신문이 촉발했다. 올해 들어 아사히의 서울특파원 경력도 있는 와까미야(若宮啓文)주필이 1월 10일자에 <내일의 사회에 책임을 갖자-「일본의 자살」을 걱정한다>라는 논설을 실었다. 와까미야 주필은 약 40년 전의 논문을 거론하여 "고대희랍도 로마제국도 스스로의 번영에 물러 터져 망했다고 지적한 것과, 일본도 중우정치(衆愚政治)로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경고한 것에 공감하면서 「일본의 자살」이 전에 없이 현실미를 띄고 느껴진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문게이 슌주가 깜짝 놀란 것 같다. 일본의 논단에서 분슌(文藝春秋)과 아사히(朝日)는 보수와 진보의 두축을 각각 대표하고 있다. 보수를 대변하는 「분슌」의 예언적 결론에 진보 측의 아사히가 동조하고 나왔으니 흔한 일이 아니다. 「분슌」은 이번 3월호에 「아사히의 주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면서 문제의 논문을 권두에 그대로 다시 실었다. 한 논자는 이 논문이 트로이의 멸망을 맞혔던 「캇산드라의 예언」 급이라고도 했다.

    이를 보면서 일본의 좌우는 나라걱정의 근본이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동시에 일본 지식계가 현재 일본을 덮고 있는 위기의 심중함에 대한 인식을 심각히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학자들의 글에 일본 재계도 주목했다. 집필 당초에 그때의 일본재계 총수 케이탄렌 도코 토시오(土光敏夫)회장이 분슌(文春)의 이 글을 읽고 카피를 하여 사방 돌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번영하는 문명의 자괴작용(自壞作用)>

    관심이 가는 것은 「일본의 자살」 예언이 행해진 시점이다. 일본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고, 제일차 석유쇼크를 스마트하게 극복하고서 번영의 한 복판에 있던 1970년대 중반에 이 예언이 행해졌다는데 있다.

    오늘 우리는 이 글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유는, 글을 쓴 일본 학자그룹이 번영을 구가하던 일본사회를 향해 경고를 발했던 내부붕괴의 위기가 오늘 우리사회에 그대로 닥쳐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소득은 이제 겨우 2만 달러 선을 넘었고, 한두 개 대기업만이 극일의 문턱을 넘을까 말까인데 우리사회의 내부붕괴 조짐은 벌써 일본사회와 같은 양상이라면 우리가 어찌 무심할 수 있을 것인가.

    집필했던 학자들은 인류사상의 번영했다 사라진 여러 문명의 몰락의 원인을 탐구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모든 문명은 재난이나 바깥으로 부터의 공격에 의해서가 아니고, 내부로 부터의 사회적 붕괴에 의해 파멸한다.」

    즉 문명의 몰락은 모든 사례에서 그 사회자체의 쇠약과 내부붕괴를 통한, 그 사회 스스로의 「자살」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몰락의 진정한 원인은 재해나 외적의 침략이 아니라, 사회내부, 즉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로마의 멸망 과정>

    지상에 비견할 나라가 없던 고대의 세계제국 로마는 어찌하여 망하였는가. 게르만족 등 만족의 침입, 정복, 지배 등에 앞서 로마사회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좌절해 버렸던 것이다.

    첫째로 거대한 부를 끌어 모아, 번영을 구가했던 로마시민은, 점차로 욕심이 부풀어, 노동을 멀리하고, 소비와 오락, 레저의 날을 지새게 되면서, 절도를 잃고 방종 타락으로 쇠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둘째로 제국각지로부터 유입된 인구로 인해 로마시의 강고한 결속과 규율의 시민 공동체는 붕괴되어 버리고, 일종의 대중사회화 상황이 고대 도시 내부에 발생했다. 대중 사회적 분위기란 덩치는 크나, 무책임하고 무규율하고 나타하고 철부지적임을 말한다. 한마디로 무질서한 대중의 집적지로 화한 로마에 새로운 조직 원리는 나타나지 않았고, 사회적 응집력을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셋째로 한 세기 이상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전쟁 등 대외정벌에 나섰다가 무산자로 되었다가 돌아온 시민들이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무상으로 노동 없는 빵이 주어졌고, 인기를 노리는 정치가들이 이를 확대해 버렸다. 일을 않고 빵이 보장되었으니, 시간이 남는 시민대중을 위한 대책으로 등장한 것이 서커스였다. 그 유명한 「빵과 서커스」는 책임과 의무는 돌보지 않고, 권리만 주장했던 시민대중에게 로마제국이 제공한 복지였던 것이다. 하는 일 없이 빵과 서커스가 보장된 시민은 유민화 되었고, 그 순간부터 무섭게 정신적, 도덕적 퇴폐는 진행되어 쇠약해 들어갔던 것이다.

    일하지 않고 「빵과 서커스」를 손에 넣었을 때, 로마 시민들은 「번영과 복지의 절정에 달했다고 착각」했으나, 로마사회의 알맹이는 썩어 들어갔고, 사회의 활력은 사라져 갔고, 그 혼은 물러빠져 로마의 몰락은 개시되었던 것이다.

    넷째로 시민의 요구대로 무상으로 「빵과 서커스」의 복지가 끝없이 주어진 결과는 인플레와 경제침체였다. 문명의 몰락 과정에는 빠지지 않는 병리현상 바로 그것이었다.

    다섯째로, 로마의 몰락과정에도 희랍문명처럼, 에고(이기주의)가 범람하고, 평등주의가 판을 쳤다. 이 속에서 민주주의는 활력을 잃었고 방종과 무질서 속에 해체 되어가는 사회를 어찌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는 사이비 민주주의로 되고 말았고, 이를 통해 지도자와 대중은 중우정치로 빠져들었다. 에고와 평등주의가 횡행하는 민주주의는 사이비 민주주의였고, 사이비 민주주의는 「몰락의 이데올로기」 노릇을 했던 것이다.

    무상의 「빵과 서커스」를 손에 넣고, 권리만을 요구하는 로마 사람들은 활력을 잃어가는 「복지국가」의 유민(遊民)이 되고 말았다. 로마사회의 심장부는 노쇠해져, 동맥은 경화되었으며, 두뇌의 총기는 사라지고, 신경은 둔화 마비되었다.

    로마시민의 에고와 빗나간 평등주의와 그들이 요구한 복지국가로 로마사회의 내부붕괴는 걷잡을 수 없이 다가왔던 것이다.

    <위기는 일본인 내부에>

    로마문명의 몰락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몰락은 기본적으로 사회내부의 자괴작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경제 문제 등에 위기적인 난제가 있다 해도, 결국은 해결책은 찾아지는 것이 지만, 문제는 그 해결책이 사회적으로 실행 불가능케 되는 상황이 그 사회내부에서 생겨난다는 점이다.

    문제해결능력과 창조성을 약화시키고 몰락으로 나아간 로마사회내부의 자괴작용의 연쇄는, 세계국가의 심장부의 번영->풍요의 대가로서의 방종과 타락->공동체적 결속의 붕괴와 대중사회화 상황의 출현->무상의 「빵과 서커스」라는 복지->증대하는 복지 코스트와 시민의 활력상실->에고와 빗나간 평등주의의 범람->사회해체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로마의 자괴(自壞)프로세스는 놀랄 만큼 오늘의 일본 사회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현대 일본문명의 자괴작용을 분석하여, 몰락의 진정한 위험요인으로 다음 몇 가지가 들어지고 있다.

    먼저, 일본인의 눈앞에 있는 위기와 시련을 정확히 인식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 둘째로 이 위기와 시련에 도전하려는 창조성과 건설적 사고가 쇠약해져 가고 있는 것, 셋째로 일본인이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는 것이 어렵게 되고, 짧은 단기간만 염두에 있어서, 장기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게 된 것, 넷째로 자멸을 재촉할 수밖에 없는 에고와 방종과 전체주의의 만연이 현재 진행형인 것 등이다.

    더욱, 자괴작용의 메카니즘을 로마와의 연관에서 압축하면, 번영과 도시화가 대중사회화 상황을 출현시켰고, 그같은 상황이 대중의 판단이나 사고력을 쇠약케 함으로써 「빵과 서커스」의 활력없는 복지국가로 갈망여서는, 에고와 빗나간 평등주의의 수렁에 빠져드는 무서운 자괴메카니즘인 것이다.

    필자들은 이 자괴 메카니즘이 로마에서와 같이 그대로 일본에서도 진행되고 있다고 통찰하고, 일본이 자살하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흘려버릴 수 없는 지적들이 있다. 현대 일본문명의 풍요와 편리성과 정보화가 일본인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약화시켰고, 정신적인 불안정과 무기력, 무책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풍요와 극도의 편리성 문화가 청소년의 체력과 지력과 의지력을 저하시켰고, 감수성이 빈약하고 극기심을 모르는 결함 청소년을 양산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첨단 정보화 사회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 한국의 청소년은 일본과 많이 다를 것인가.

    여하튼 일본의 현대문명은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일본인의 정신생활을 해체해 버렸고, 윤리감을 마비시켜 일본인의 내적세계를 황폐케 하였다. 일본인의 이 정신의 황폐가 일본사회의 자괴작용의 기반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자살」 논자들이 일본사회를 자괴해 들어가는 작용력을 두드러지게 강조해 보인 두가지 점에 특별히 유의하고자 한다. 하나는 일본의 복지국가 노선의 정착이고, 또 하나는 평등주위 이데올로기이다.

    <복지국가의 자기 파괴력>

    아사히신문의 주필이 「일본의 자살」이 현실로 다가왔다고 했을 때, 그 구체적 내용은 그동안 누적된 일본의 재정적자가 드디어 파탄나서 세계의 경제위기를 불러올 지경에 다달았다는 것이다. 이미 1000조엔 달하는 일본의 재정적자가 일본의 목을 조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해결책으로 소비세 증세 외에 달리 수가 없다는 것을 모두 알면서, 정국의 쟁점으로서만 왈가왈부가 있을 뿐, 그것을 실현하려는 리더십은 좀처럼 결단하기 어려운 구조 속에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적자국채 발행이라는 마약에 손을 댄 경위가 복지국가 노선의 정착과 불가분이라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빵과 서커스」에서도 보았듯이, 복지국가는 시민의 일방적 권리요구 및 자율정신의 상실과 정치인들의 대중 영합적 포퓨리즘의 합작품이다.

    복지국가가 한번 문을 열면, 시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가에 의존하여 기생하려는 정신에 다투어 몸을 맡기고 만다.

    독립자존의 정신의 퇴조를 복지국가는 부추긴다. 복지국가의 종착역이 사회규범의 붕괴와 사회해체인 것의 교훈을 일본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뼈에 새기려 들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경우, 올해 들어 0-2세 무상교육이 시작되자, 공짜라고 구립의 어린이집 한곳의 대기자가 3800명까지 부풀어 올랐다고 한 신문에 보인다. 우리 정치인들이 알기나 하고 정치마약인 무상복지에 손을 대는 것일까.

    <평등주의와 자살 이데올로기>

    여러 문명의 몰락의 역사를 훑어보고서 「일본의 자살」의 필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몰락과정에 반드시 등장하는 문명의 「자살 이데올로기」이다. 일본사회가 이른바 전후민주주의를 지나친 평등주의로 받아들인 것이 일본을 향해 자살을 가져오는 「자살이데올로기」 라는 것이다.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디라 할 것 없이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대중사회화 상황을 현출시키면서 전 사회를 무서운 힘으로 풍화시키고 사막화시키는 것이다.」 특히 교육 분야에 밀고 들어간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는, 차별반대의 「민주교육」의 이름으로 엘리트 교육의 근저를 파괴함으로써, 그 사회적 손실이 100년에 뻗치게 될 「일본의 자살」 행위를 저질러 버렸다 하고 있다.

    난제 앞에 우왕좌왕하는 정치가들을 안고서 일본사회는 지금 프랑스의 ENA(국립행정학원)같은 통치 엘리트 양성교육을 할 수 없게 했던 전후의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ENA처럼 「특별한 인재에게 특별한 교육을 실시하고, 특별한 대우를 제공 하는」 것을 전후 일본의 평등주의는 절대로 양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올해 한국 정치판의 중심적인 이슈로 되어 있는 무상 복지와 격차비판, 이 두 가지 모두가 평등주의 이데올로기에 연원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자살」 필자들이 지나친 평등주의를 「자살이데올로기」라고 까지 통박하면서 오늘에도 경종을 울리는 것에 우리는 눈 감기 어렵다.

    <「일본의 자살」의 교훈>

    「일본의 자살론」을 간단히 말해본다. 세계대전에 패하고서 기를 쓰고 경제대국의 풍요와 번영의 정상에 일본은 도달하게 되지만 그 일본사회 내부에, 그리고 일본인 내면에 일본몰락을 예고하는 쇠퇴현상과 병리현상은 생겨나 버렸고, 몰락이 진행중이라고 자살론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고서 약 40년이 지나 오늘의 일본을 향해 그 「자살 예언」은 맞아들고 있지 않느냐고, 확인하는 한편,「자살탈출의 길」을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글을 통해 제시하고자 절박한 심정으로 「일본의 자살론」은 다시 등장한 것 같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심각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한국의 번영과 풍요는 아직 일본에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데, 풍요가 갖고 온 병리라 할 자살율과 저출산율은 일본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풍요 한국의 젊은 세대에 일어나고 열화(劣化)현상을 누가 모른다 할 것인가. 「일본의 자살론」 이 제시한 교훈을 가감 없이 옮겨보겠다.

    <제1의 교훈>

    국민이 좁은 이기적 욕구의 추구에 몰두하여 스스로의 에고를 자제할 줄 모를 때, 경제사회는 자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비자든, 근로자든, 정치가든, 경영자든, 이기적 충동에만 떠밀리지 말고, 어딘가에서 조화점을 터득하지 못하는 한, 사회는 추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2의 교훈>

    국제적이든 국내적이든 국민이 스스로의 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자립의 정신과 기개를 잃어버릴 때 국가사회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지」가 치러야 할 참으로 무서운 대가이다.

    <제3의 교훈>

    엘리트가 정신의 귀족주의를 잃고 대중영합주의(포퓨리즘)으로 내달릴 때 그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다.

    지도자란 지도자임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서 말할 것은 말하고, 행동할 것은 하여야 한다. 설령, 그것이 대중이 싫어할지라도, 그 발언과 행위로 고립되는 일이 있어도, 엘리트는 용기와 자신을 갖고서 주장할 것은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제4의 교훈>

    나이 많은 세대는 나이 어린 세대에게 비위를 맞춰서는 안 된다. 젊은 세대란 나이든 세대와의 엄중한 투쟁과 절차탁마 속에서만 드디어 우람하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나이든 세대가 너무 이해심이 많아서 젊은 사람들에게 가슴팍을 내주어 단련시키는 것을 잊으면, 젊은이는 「콩나물 인간」이 될 뿐이다.

    <제5의 교훈>

    인간의 행복이란 임금이나 연금 등 물량으로만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아주 평범한 얘기다. 인간이 물욕에만 잡혀 있는 한, 여하한 욕망 충족의 노력도 끝없이 비대화하는 욕망 그 자체를 따라 잡을 수가 없고, 만족은 영원한 피안일 뿐이다. 욕망의 비대화 사이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워 지지 못하면, 인간은 늘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안심의 경지와는 무연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