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보수의 뿌리와 정체성
                      -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인가-

            南時旭 /언론인・세종대 석좌교수

     개혁시대에는 부득불 파괴방법을 맹렬히 실행해야 부패한 국가와 부패한 사회를 개량하리라 하나 각국의 혁신사에 대하여 그 경험의 실제를 연구한 즉, 실로 파괴주의는 완전한 이익이  없고, 보수주의로 진보함이 극히 좋은 방침이 되는 줄로 사유하노라…현재 국내 물정으로  논단하건대 수구파가 대부분이요 구신파(求新派)는 소수이므로 진보를 위해서는 구신파가 수구파에게 충격을 주어 보수주의를 타파하려 하지 말고 그들을 이용할 방법을 취해 개량진보를 기도함이 완전한 방침이라…
                     -『황성신문』 1909.11.17자 논설 “보수주의로 진보함이 가량(佳良)한 방침”에서


    1. 보수세력의 뿌리 개화파

    1-1 개화파 인맥
      한국 보수세력의 뿌리는 1870〜1890년대 조선조 말  집권세력인 수구파에 맞서 문명개화(文明開化)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한, 당시로서는 진보세력인 개화파이다.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개화파 1세대라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2세대이다.  1세대의 대표이면서 개화파의 비조(鼻祖)인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교육받은 2세대 인물들은 실패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며 개화당이라고도 불린다. 이승만 안창호 양기탁 등은 개화파 3세대이다. 이들의 대표격인 이승만은  젊은 시절 개화파의 행동단체인 독립협회의 급진파 청년회원이었으며  2세대인 서재필의 배재학당 시절 제자이다. 그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지내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을 건립,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건국의 주역이다. 그는 말하자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 우익・보수세력의 원조 격이라 할 것이다.

    개화파와 보수세력의 인맥

    1세대
    박규수(1807) 오경석(1831) 유홍기(1831)
    2세대
    김옥균(1851) 홍영식(1855) 유길준(1856) 박영효(1861) 오세창(1864)
    이상재(1850) 서재필(1864) 윤치호(1865)
    3세대
    이승만(1875) 안창호(1878) 양기탁(1871년) 신흥우(1883)


    1-2 개화파의 사상
      개화사상은 실학파의 전통에다 개화사상의 선구자 자신들이 직접 중국 일본 미국 등지에서 견문한 바를 접목한 개혁사상이다. 개화사상은 중국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처럼 한국의 경우 유교사상은 지키되 서양의 과학기술만 도입하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편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명치유신처럼 유교사상까지 타파하자는 급진개화파로 나뉜다. 급진 개화세력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몰락했으나 10여년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지원 아래 사면․복권되어 다시 정치현장에 복귀했다. 이들 후기 개화운동가들은 개화파 2세대로 미국에 망명했다가 귀국한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협회를 만들어 자유민권운동과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후기 개화파는 갑오경장 때 광범위한 행정개혁과 사회개혁을 단행하고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에는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했다. 

    1-3 개화사상과 실학사상
      개화사상은 실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선 인맥을 살펴보면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박규수는 실학파의 거봉 박지원의 친손자이고, 개화사상가인 오경석과 강위는 실학파의 거두 김정희의 문하생들이다. 실학사상은 한국적인 민권사상과 변혁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개화사상에 영향을 준 실학파 가운데 민주적 정치사상을 주장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조선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탕론’(湯論)은 정통주자학적 정치사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혁명론이다.
      자유민권과 부국강병을 핵심으로 하는 개화사상은 민족주체의식의 고취, 이용후생(利用厚生)과 무실역행(務實力行)의 방법론, 국제관계의 새로운 관점, 문화개방의 제창, 민중참여의 확대, 상공업의 장려 같은 구체적 문제에서 실학사상을 그대로 계승했다. 박규수는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려면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해 산업을 일으키고, 무기를 개발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로 가야 한다고 믿었다. 초기 개화사상가들은 부강한 근대국가의 건설을 위해서는 먼저 조선왕국이 청국의 지배로 부터 탈피해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주장은 자연히 전통적 유교질서를 고수하려던 쇄국주의적인  수구파의 위정척사사상과 대립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는 교육장려, 신문발행, 군대조련의 세 가지 국정개혁안을 국왕에게 상주(上奏)해 윤허를 얻음으로써 국정개혁에 시동이 걸렸다. 그러나 이들이 수구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갑신정변이 중도에 청국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해 '3일천하'로 끝남에 따라 그 세력은 모두 몰락하고 그들의 개혁정책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2. 보수・진보 세력의 분화

    2-1 기미독립운동 이후 시작된 이념적 분화
      한국의 정치세력에 대해 '보수'니 '진보' 니 하는 이름이 붙여 진 것은 1882년 개화파의 대표인 김옥균이 일본을 방문한 무렵부터였다. 당시 일본신문들은 김옥균을  ‘조선개화당 수령’이라고 불렀다. 개화당은 또한 ‘독립당’ ‘개진당(改進黨)’ ‘진보당’ ‘일본당’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개화당의 적수였던 민씨 일파는 ‘사대당’, ‘보수당’, 또는 ‘청국당’으로 호칭되었다. 개화파 자신들도 '진보'라는 말을 좋아해 기회 있는 대로 '진보' 라는 용어를 썼다. 이들은 『독립신문』창간 이후 폐간 때 까지 계속적으로 '개명진보'(開明進步)를 강조함으로 스스로 '진보'의 편에 섰음을 밝혔다. 독립협회가 주선한 독립문 기공식 때 배재학당 학생들은 '독립가"와 함께 '진보가'를 불렀다. 그렇다고 『독립신문』이 무조건 '진보'만을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독립신문』 영문판은 미국 공화당의 정강을 논하는 사설에서 “애국심, 모국어에 대한 애착, 그리고 친척에 대한 사랑과 환경에 대한 적응 같은 보수적 경향은…인간의 가장 훌륭한 품성들”이라고 찬양했다. 이어 이 신문은 조선정부의 인사정책을 비판하는 사설에서 “정직한 보수주의(honest conservatism) 같은 것도 존재하므로  보수층에도 정부의 모든 관직을 채울 수 있는 큰 죄 없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다”고 썼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보수파'와 '구신파'(求新派)를 대비시켰다. 이 글의 모두에 나오는 『황성신문』의 논설 가운데 '진보'라는 용어는 발전과 혁신을 의미한다.

    2-2 진보 보수 라는 용어의 역사
      한국의 정치세력이 좌우로 나뉜 것은 1917년 중국 상해에서 조선사회당이 결성되고 이듬해 소련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만들어진 데 이어 20년에 상해와 소련의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이 성립된 때 부터였다. 국내에서는 1919년 일본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공산단체라는  지하조직이 생긴 것을 계기로 조선공산당과 사회혁명당이 결성되고 1925년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별도의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이 무렵부터 좌우 이념대립이 일기 시작하여 1922년 연말에는 “조선 민중이 취할 길이 사회주의에 있는가, 아니면 민족주의에 있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그칠 줄을 몰랐다. 사회주의세력은 이른바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스스로를 '진보세력'이라고 부르면서 민족주의 진영의 민주주의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공격했다. 이때부터 우익은 민족주의세력으로, 좌익은 사회주의세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1940년대 후반의 해방정국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었다. 김일성도 해방 직후에는 우익세력을 ‘민족주의세력’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처럼 좌파를 진보로, 우파를 보수로 부른 예는 1945년 9월 결성된 민족주의진영의 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발표한 강령에 보인다. 4개조로 된 이 강령은 연합군에 대한 감사(제1항), 국민대회 결성(제2항), 중경 임정의 법통지지(제3항)를 다짐한 다음 제4항에서 "보수 진보 두 갈레의 정당을 만들어 민주주의 방식에 의한 정당정치를 실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보'라는 용어는 최근까지 이승만정부 때 결성되었다가 해산당한 조봉암의 '진보당'의 경우를 제외하면 별로 쓰이지 않고 '혁신정당' 또는 '혁신계' 라는 애매한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3. 민주 공화제의 도입 경위

    3-1 헌법 제정운동과 입헌군주제 주장
      대한제국 말까지 독립협회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자유민권과 3권분립, 그리고 헌법제정과 입헌군주제 및 민회(국회)의 도입을 주창하면서도 황제의 폐위를 의미하는 공화제는 주장하지 않았다. 충군애국(忠君愛國)을 표방한 독립협회의 회장 윤치호는 취임 즉시 “우리는 황제와 황실을 사랑한다. 황제와 황태자 및 황실에 불경한 말을 엄금하며 (회원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준은 일본이 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해서 국권을 강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립하고자 헌정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공화제나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공화제 논의가 나온 것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후였다. 이승만은 1904년 옥중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이라는 저서에서 절대군주제와 입헌군주제도 및 민주주의제도를 자세하게 비교 소개하면서 입헌군주제에 대해 “오늘날 가장 합당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과 프랑스 식 민주주의제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좋은 정치라 할 것이다”라고 평가하면서도 정치제도의 성패는 그 나라 백성들의 수준에 달려있으므로 정치제도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헌법만은 곧 제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옥중수기는 1910년 로스앤절리스에서 발간되었다.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설립한 공립협회(共立協會)도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비록 나라는 이미 일본의 보호국으로 떨어지고 황제 역시 아무 실권도 없던 때였지만, 군주제를 폐지한다는 사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공립협회는 전제정치로 인한 폐습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나라를 되찾는 일은 근본적으로 전체정치를 변혁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며 이를 위해 ‘주권재민론’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장에서 공립협회는 국민의 권리를 찾기 위해 임금을 제거하고 새로운 국민적인 정부를 세우는 ‘국민혁명’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바로 ‘국민의 의무’이며 이런 국민혁명을 통해 ‘국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2 공화제 도입
      공화주의는 1919년 3・1운동 이후 설립된 여러 임시정부의 헌법(헌장)에 대부분 도입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이 완전히 사라지고 황제 역시 없어진 마당에 더 이상 충군애국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여전히 독립회복과 황제의 복위를 바라던 유림(儒林)에서는 공화제를 채택한 임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각 임정이 공화제를 채택한데는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이 수립되어 공화제가 시대의 흐름으로 인식된 것도 한 동기였다.  
      독립운동가들이 공화제를 채택하면서 이를 이론화한 과정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 등은 1917년 7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 가운데 후일 임시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하는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의 기초가 된 공화주의의 이념을 명백히 했다. 이 선언은 “융희 황제가 삼보(三寶)를 포기한 8월 29일(즉 1910년의 합병조약 발표일)은 바로 오인동지(吾人同志)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사이에 순간도 멈춤이 없었음이라. 오인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제권소멸(帝權消滅)의 시(時)가 곧 민권발생(民權發生)의 시(時)요, 구한(舊韓) 최종의 일일(一日)은 즉 신한(新韓) 최초의 일일(一日)"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경술년 융희 황제의 주권포기가 국민들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이므로 국민들이 당연히 삼보를 계승해 통치할 특권이 있다는 의미이다. 융희 황제의 주권 포기는 외국에로의 주권의 양여가 아니라 국민에로의 주권 양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론적 기초였다. 이는 고유주권론, 혹은 주권불멸론으로서, 대한제국의 주권을 황제로부터 국민이 계승했다는 국민주권론의 이론이다.

    3-3 이승만의 공화제 방안

      한국 보수세력의 원조라 할 이승만은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건국 프로그램이라 할 ‘건국종지’(建國宗旨)와 ‘대한공화국 헌법 대강’을 마련하는데 주동역할을 했다. 첫 번째 문건인 ‘건국종지’는 1919년 4월 14〜16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100명의 독립지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차 한인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에서 채택한 5개의 결의 중 하나이다. 그 내용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중앙정부는 국회와 행정부로 구성하며,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문건은 또한 민중의 교육수준이 낮고 자치능력이 부족한 사실을 감안해 정부 수립 후 10년간은 중앙집권적 통치를 하되, 정부가 그 기간 동안 국민교육에 치중함으로써 민중이 미국식 공화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 문건인 ‘대한공화국 헌법대강’은 1919년 8월 27일 이승만이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작성 발표한 것이다. 이 헌법대강은 이승만이 그해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추대되자 스스로 ‘대한공화국 대통령’(President of the Korean Republic) 자격으로 수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개설한 직후 그 위원장 김규식과 공동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이 헌법요강은 국체를 공화제로 하고 교육을 특별히 장려한다는 점에서는 앞의 건국종지와 내용이 같지만 종교와 양심의 자유, 언론결사의 자유, 귀족의 특권 폐지, 정교분리, 민병대 조직, 소수파 보호, 독립된 사법부 설치 등이 새로 들어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 보수세력의 원류인 개화파와 이들의 전통을 이은 독립운동가들은 민회(국회)를 설치해 영국식 입헌군주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해오다가 1919년 기미독립운동 후에는 공화제를 채택, 임시정부의 헌장에 명문화했다.  이 점은 자유민주주의제도가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에 의해 비로소 한국 땅에 이식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한국의 보수세력에게 보존할 무슨 가치가 있느냐는 일부 논자들의 질문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모르는 우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4 대한민국 건국과 보수세력

      이승만은 1946년 3월부터 5월까지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미소냉전의 시작으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무기휴회되자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정읍발언'으로 알려진 이 연설에서 그는 "무기휴회 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무렵 미군정청은 국무성의 지시에 따라 여운형과 김규식을 주축으로 하는 좌우합작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군정청은 좌우합작 협상 파트너에서 조선공산당(조공)과 이승만-김구의 임정계는 제외했는데, 조공에 대해서는 극좌파인 그들과는 온건한 타협의 정치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이승만과 김구를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키로 한 것은 이들이 반탁운동으로 군정청의 권위에 정면도전 한 극우파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소련이 그해 2월 북한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정권을 수립하여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마당에 남한에서의 좌우합작과 미소공동위에서의 임시통일정부 수립노력은 남한마저 공산화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초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의 친소적인 한반도정책에 반대한 이승만은 트루먼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국무성 간부들이 대소유화노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해 반발해 반탁운동의 선봉에 섰다. 정읍발언 이후 '자율정부수립' 운동에 나선 이승만은 그해 12월 도미해서 미국무성이 추진하는 대한정책의 부당성을 홍보하는 섭외활동을 미국 조야를 상대로 폈다. 미국정부는 처음에는 이같은 이승만의 태도에 대해 몹시 불만이었으나 미소간의 냉전이 본격화하고 한국 국내에서는 좌우합작협상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모두 실패로 돌아간 1947년 7월부터는 종래의 대한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갔다. 결국 미국정부는 1년여만의 시행착오 끝에 한반도 신탁통치방안을 백지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반탁노선에 동조하는 셈이 되었다.
      이승만의 자율정부수립 노선에 좌익세력은 물론이고 김구 등 우익세력 일부도 반대해 우익진영의 분열이 초래되었으나 오늘의 시점에서 평가할 때 이승만과 그에 동조한 한국민주당 등 보수세력의 선택은 최선은 아닐지언정 차선의 부득이한 현실적 결단이었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비록 남한지역에만 수립된 국가이기는 하지만 조선조 말 개화파와 그 맥을 이은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근대적 국민국가의 실현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 즉 자유와 인권과 민주주의는 현재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위상을 차지한 나라로 성장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4. 보수세력의 공과와 정체성

    4-1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된 보수주의 사상
      한국의 보수세력은 건국과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함으로써 오늘의 한국을 세계 제13위의 경제대국이자 G-20 국가의 하나로 만든 주역들이다. 한국의 현대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든 이 점만은 누구도 부인 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약 20년의 시간차를 두고 1940년대(후반)에는 건국을 하고, 1960년대에는 산업화 단계로, 1980년대에는 민주화 단계로 각각 들어섬으로써 서양에서 300〜400년 이상이 걸린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반세기 만에 달성하는 기적을 이룩해 국가적 정통성을 확보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정보통신의 최선진국일 뿐 아니라 한류(韓流)라는 특이한 소프트 파워를 자랑하는 세계 중견국가의 하나로 성장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분단 60여년만에 봉건적인 세습왕조로 변한 스탈린주의적인 북한정권에 비해 체제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2차대전 종결 때 식민지였던 대한민국이 이처럼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발전을 거듭한 데는 건국의 주역인 한국보수세력의 정치적 경제적 보수주의 이념, 다시 말하면 '한국적 보수주의' 사상이 원동력이 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뒷받침된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한국 보수세력의 업적을 산업화에만 국한하는 경향이 있으나 민주화 역시 보수세력의 업적임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에 민주주의의 기적을 이룩한 민주화세력은 넓은 의미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뚜렷이 성장한 총체적인 국민역량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정통 보수야당의 역할은 컸다. 6월항쟁의 중요한 추진세력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끈 민주통일당이라는 정통보수야당과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계와 각 시민단체의 지도자들, 그리고 보수성향의 언론을 포함하는 한국보수세력이다.

    4-2 보수세력의 어두운 점과 그 원인
      한국의 보수세력은 많은 과오도 범했다. 그들의 공로가 과오보다는 분명히 더 컸지만, 과오는 어디까지나 과오이다. 보수세력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부 보수세력은 일제 때 친일하고,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정권 때는 장기집권과 인권탄압에 협력하거나 동조했다.
      한국에서 권위주의정치가 출현한 배경은 한국 보수세력의 원조라 할 개화파들의 부국강병사상과 실력양성론, 그리고 사회유기체적 국가관과 사회진화론적 국제관과 관련이 있다. 이들 중 일부는 근대화와 실력배양을 최고의 가치로 신봉함으로써 국권수호와 민족주의적 가치를 경시하는 과오를 범했다. 급진적인 근대화사상에 매몰되어 국권수호를 그르친 예가 친일파로 변절한 일부 개화파들의 경우이다.
      한국보수세력의 또 다른 과오는 부정과 부패, 그리고 도덕적 타락이다. 이 역시 정통 보수주의 철학에서 일탈한 결과이다. 장기간의 권위주의 정치는 권력층의 특권의식과 부패를 가져왔다. 이승만 정권 12년, 박정희정권 18년, 그리고 전두환 정권 7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거치면서 부패, 특히 권력형 부패와 정경유착이 누적되었다. 물론 독재만이 부패의 원인은 아니다. 민주화 이후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 정권과 현재의 이명박 정권에서조차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권력핵심부에는 여전히 부패의 독버섯이 온존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국제민간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TI)에 의하면 2010년 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는 10점 만점에 5.4점을 얻어 조사대상 178개국 중 39위를 기록했다. 이 점수는 2008년 이래 5.6점→5.5점→5.4점으로 해마다 뒷걸음친 결과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2010년 부패인식도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6.6%가 부패 문제 해결이 가장 시급한 부문으로 정당과 입법부를 지목했다. 또 다른 국민의 신뢰도 조사에서도 민의의 대변기관이라는 국회가 5점 만점에 2.33점으로 9개 주요 기관 중 최하위였다. 이상과 같은 한국 보수세력의 과오는 모두 정통 보수주의의 일탈에서 비롯된 흑점(黑點)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 한국보수세력의 과제 

    5-1 보수세력이 지켜야 할 가치
      보수주의는 인간사회의 발전을 혁명적 방식이 아닌, 점진적 방식에 의해 실현하자는 태도를 말한다. 문자 그대로 그 사회의 기본적 가치를 보존하면서 변화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영국의 보수주의는 혁명 대신 의회정치제도를 지키자는 것이고, 독일과 프랑스의 현대 보수주의는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기존의 공화정을 지키자는 것이며, 미국의 보수주의는 200여 년 전의 독립선언서에 규정된 자유주의를 지키자는 것이다. 일본의 보수주의는 공산혁명으로부터 천황제를 지키자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보수세력이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보수적 가치는 자유주의 반공주의 법치주의 사유재산권존중, 점진주의적 개혁, 그리고 민족문화 전통 애국심 애향심 예절 부모공경 경로사상에서부터 일부일처제 낙태반대 동성혼인반대 등 기존 가족제도의 옹호도 포함된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건국과정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이념으로 받들고 이를 공산주의로부터 지키려했다. 그들이 지키고자 한 두 가지 가치체계는 당시는 물론 현재도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미완성의 상태이다. 아무리 발달된 선진국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100% 달성될 수 없는, 수준의 문제일 뿐이므로 미완성의 가치체계라 해서 대한민국의 가치체계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미완성의 이념을 지키면서 가꾸는 것이 지금까지 한국보수세력이 걸어온 발자취요 동시에 앞으로의 과제이다.
      자유와 평등, 경쟁과 공정, 성장과 분배, 그리고 개방과 보호, 보수와 진보, 또한 개인과 사회, 시장과 국가-이들 서로 상충되기 쉬운 명제들은 인간사회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느 나라, 어느 사회도 쉽사리 해결할 수 없었던 난제들이다. 한국보수세력이 시도해야 할 것은 이 같은 난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보수적 가치를 지키면서 이런 난제들을 균형 있게 해결하는 일이다.

    5-2 보수세력 거듭 태어나야 
      한국의 보수세력은 그동안 치열한 좌우투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보수세력의 반공주의는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진보’라는 이름아래 대한민국을 부정, 전복하려는 혁명적 좌파세력이 발호하는 한 한국의 보수세력에게는 방어태세가 불가피하다. 그것이 바로 ‘방어적 민주주의’이다.

      이명박 정부가 ‘중도실용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칙에 철저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이들을 지지한 보수층의 실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시장방임주의나 시장만능주의로 나가라는 말이 아니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시장경제라는 대원칙을 지키면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5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비전을 갖고 포퓰리즘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복지문제만 해도, 근대적 사회복지정책은 보수정치인인 독일의 비스마르크(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재상이 가장 먼저 시행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복지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인기영합정책과 타협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반값 대학등록금 구상을 발표했다가 당론과 멀다 해서 나중에 입장을 번복한 사실일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번 10・26 지방선거 때 서울에서 참패한 것은 자업자득이다. 선거막판에 이명박 대통령의 퇴임 후 거주할 사저 건축용 대지 구입문제와 청와대 비서진 등의 권력형 부패 스캔들이 불거져 나온 것은 감표요인이 되었다. 한나라당의 무능과 방향감각 상실은 이 보다 더 큰 감표요인이 되었다. 170석에 달하는 절대다수 의석을 보유한 한나라당은 소수야당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야당이 국회의사당을 쇠망치와 전기톱, 그리고 몸싸움으로 얼룩지게 하는 것을 막지못하고 예산안과 민생법안을 비롯한 중요 의안의 심의를 제대로 못했다. 국회가 본연의 역할에 소홀해지고 정치윤리가 실종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챙기는데 열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하고, 가족 수당을 마련하고, 보좌진 수를 늘리는가 하면, 국회의원 퇴직 후 월 120만원이라는 특별연금을 타도록 법을 개정하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행태를 드러냈다. 이런 그들이 가난한 노인들에게 지급하는 월 9만원의 기초노령연금의 인상을 관계법에서 약속해 놓고도 3년을 질질 끌고 있다. 이쯤 되면 국회는 국민의 대변기관이 아니라 국회의원 자신의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권력기관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국의 의회민주주의가 타락한 책임은 결국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번 서울시장 보선에서 한나라당은 가진 자와 수구 기득권자들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털어버리지 못해 패배했다.

      보수세력은 과감한 자기 혁신을 통해 대한민국의 선진화와 통일을 향해 깃발을 든 믿음직한 세력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 양대 선거에서도 비슷한 고배를 마실 가능성이 있다. 내년에도 역시 선거판이 청년층과 노년층,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기득권층과 반기득권층, 그리고 현상유지세력과 현상타파세력 간의 대결구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보수세력이 단합되어도 힘들 내년 양대 선거에서 또 다시 대권욕에 사로잡힌 대선주자들 때문에 빚어진 1997년과 2003년처럼 분열상을 보인다면 보수세력은 비참한 패배를 맞볼 것이다. 
      2012년은 미국 중국 러시아에서도 지도층이 바뀌고 북한에서는 김일성 출생 100주년, 김정일 출생 70주년을 맞아 ‘강성대국의 대문’에 들어서겠다는 해이다. 세계와 한반도에 중요한 변화가 예고되는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아 한국의 보수세력은 ‘통일선진한국’을 이룩하는 믿음직한 정치세력으로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지 않으면 또 다시 커다란 시련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南時旭> 
    ◉ 1938년 출생.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석사,독일 베를린국제신문연구소 수료.
    ◉ 동아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 상무이사, 문화일보 사장, 현 세종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취재보도론).
    ◉ 저서: ≪한국보수세력연구≫ ≪한국진보세력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