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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가 분단된채 더 이상 살수 없다" 최후통첩 <새연재: 한미동맹>
아이크에 정면 도전..."휴전 강요는 사형선고, 단독북진 통일" 절규
"반공포로 한명도 못보낸다" 이승만, 원용덕에 석방명령서 즉석 작성
[인보길 기자]  2017-09-13 20: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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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⑨ 반공포로 석방명령서


인 보길 /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스탈린, 졸도 5일만에 사망 "베리아가 죽였다" 미스터리

스탈린이 갑자기 죽었다. 1953년 3월 5일, 6.25전쟁을 일으킨 침략의 원흉이 사라졌다.

아이젠하워가 미국34대 대통령에 취임한지 한 달 반 만에 스탈린도 숨을 거둠으로써
한국전쟁의 양대 교전국 수뇌가 거의 동시에 바뀐 것이다. 

스탈린은 왜 죽었는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그 사인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모스크바의 추위를 피해 따뜻하고 아름다운 흑해(黑海) 연안 별장에서 보내던 74세 스탈린은
그 주말(2월28일)에도 연회를 열었다. 말렌코프와 베리아, 불가닌, 흐루시초프가
이 연회에 초대되어 만찬을 즐기면서 영화를 관람했고 다음날 새벽4시쯤 파티는 끝났다. 

기분좋게 취한 스탈린은 웃으면서 흐루시초프의 배를 찌르며 헤어졌다고 한다;(흐루시초프 회고록). 경호원들에게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간 스탈린은 그러나
이튿날 하루가 다 가도록 기척도 없었다. 안절부절하던 경호원들은 저녁나절 방에 불이 켜지자
안도했지만 들어가 보고 싶어도 명령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마침 우편물이 오자 이를 핑계 삼아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었다.
경호원은 기절할 뻔 했다. 스탈린이 방바닥에 쓰러져있고 의식은 있어도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듯 깨어진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말렌코프와 베리아등 간부들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 관속에 누운 스탈린.


이때부터 중환자 스탈린을 다루는 베리아의 언동에 온갖 의혹의 시선이 집중된다.
비밀경찰등 공안기관을 한손에 쥔 베리아, 그의 권력이 너무 커져 당시 스탈린도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었음이 뒤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연회중에 베리아가 스탈린의 음식에 독을 탄게 아니냐는 추측이 정설처럼 퍼졌다.
연락을 받은 베리아는 경호원에게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며 의사도 부르지 않았다.
사흘후 3월3일 의사들은 스탈린의 사망이 시간문제라고 진단하였다. 말렌코프와 베리아는
긴급 정치국회의를 주도하고, 후임 수상에 말렌코프, 제1부수상에 베리아를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베리아는 이때 내무부에 대한 통제권도 장악, 실제중의 실세로 자리잡았다.
그는 여러 정치국원들이 병상을 지키고 있는 자리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험담을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얼굴이 변하고 입술이 검게 되더니 갑자기 눈을 떴다.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아버지는 손을 들어올려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주하려는 듯 하는 순간  
숨이 끊어져 버렸다." 이때 베리아가 방을 뛰쳐나가면서 운전사를 불렀는데
그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었으며 얼굴이 빛났다”고 흐루시초프는 증언한다.
잔혹한 크렘린궁의 권력투쟁 드라마, 흐루시초프는 3개월 뒤 베리아를 공개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3년 뒤에는 스탈린 독재30년의 격하운동을 벌인다.

▲ 학살자 트리오, 스탈린, 베리아, 마오쩌둥.


북한 묘향산 별장에서 김일성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의료진의 접근을 지연시켜 숨지게했던
아들 김정일은 그 수법을 베리아한테 배웠던 것일까.
3월9일 스탈린의 시체는 스탈린을 제거하려다 죽은 레닌 옆에 나란히 묻혀
레닌묘는 레닌-스탈린 묘가 되었다.

한민족의 철천지 원수 스탈린, 러일전쟁서 잃은 한반도를 공산화로 지배하려
미군보다 먼저 점령하고 유엔의 남북한 총선을 거부하여 분단을 고착시키고
김일성을 시켜 무력남침으로 삼천리 강토를 초토화시킨 최악의 범죄자 스탈린은
소련인민 2천만명을 숙청-집단살해-굶겨 죽이고, 우리 한민족 수백만명을 희생시킨
희대의 학살자이며, 죽어서도 한반도를 분단시킨 불구대천의 악마이다.
그가 만든 분단체제는 그의 꼭두각시 김씨왕조의 핵으로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 



소련의 휴전 호응 지시...김일성은 좋아서 "듣던중 반가운 뉴스"

스탈린이 죽은 열흘 뒤 3월15일 클레믈린서 말렌크포는 신임수상 취임연설에서
“소련은 미국과 제반문제에 관하여 평화적인 협의를 바란다”며 “평화협상으로 해결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선언하였다. 부수상 베리아도 “모든 국가와 평화를 유지하기 바란다”고 했다. 

한국전쟁의 휴전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 반대한다'던 스탈린 말대로 '휴전 반대'는 끝났다.

미국무성은 “말로는 믿지 못하겠으니 실천으로 보여달라고”고 응수하였고,
아이젠하워는 19일 백악관 기자단 회견에서 “소련의 평화적 의도는 그들의 성실한 행동으로써
판단될 것”이라며 “미국은 소련과의 모든 대화에 문호가 개방되어있다”고 화답하였다.

모스크바 방송은 연일 ‘평화공존’을 떠들었고 모로토프 외무상은 영국와 프랑스에 대하여
“북한에 억류된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석방을 위해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표시하였다.
동시에 소련 각료회의는 이제까지 추구해온 스탈린 정책을 계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선언,한국전쟁에 대하여 원칙을 바꾸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였고 이를 중공과 북한에 통고하였다.
”소련은 가능한한 조속한 전쟁종결을 원하며 이것은 소련과 중국 및 북한 인민들이 원하는
바이므로 이에 부응하라“고 김일성에게 공식적으로 촉구하면서, 지난 2월 클라크 유엔사령관이 제의했던 상병(傷病)포로 교환 협상에 긍정적으로 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방침을 직접 설명하기 위해 3월29일 평양을 방문한 소련 특사 쿠즈네초프(Kuznetsov)는
북한 김일성이 “듣던중 반가운 소식”이라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뉴스를 전해주어 기쁘다”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 했다는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내고있다.

중공도 소련의 변화에 대체로 환영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장기전을 원했던 마오쩌둥은
“서울의 이승만이 휴전을 몹시 반대하고 있으니 걱정”이라며 판문점 협상문제를 우려하면서도
저우언라이로 하여금 김일성과 펑더화이에게 상병포로 교환제의를 받아들인다는 회신을
유엔측에 방송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6개월넘게 휴회상태인 정전회담을 재개하자고
3월31일 클라크에게 제안하였다.

▲ '한미방위조약 체결이 선결' 휴전전에 맺어야...4단 박스기사가 보인다. ⓒ조선DB


상황 급변에 국가 비상...폭발한 휴전 반대 투쟁 

물길을 막았던 스탈린이 빠지자 휴전협상은 봇물 터지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산측의 상병포로 교환 합의에 이어 “빠르면 5월중 휴전 성립”이란 풍설마저 나도는 분위기가
되었다. 국내외 각국 여기저기서 ‘한국전쟁 조속종결’을 반기는 논평들이 나올 정도였다.

유엔측 대표 해리슨은 반공포로 관리권을 중립국에 위임하는 인도(印度)의 절충안안에
공산측이 긍정적태도를 보이자 남일에게 호의적인 서한을 보냈다. 
판문점 회의는 그동안 입씨름을 거듭해왔던 모든 논쟁꺼리를 백지화, 원점으로 돌렸다. 

영국의 처칠이 이때란 듯이 튀어나와 ‘한국 통일계획’을 논의한다는 ‘휴전후 정치회담’ 계획을
미국과 공동안을 작성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승만은 즉각 반기를 높이 들었다.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이승만은 “경계선이 어디가 되든지 국토를 분할하는
전쟁해결은 침략자에 대한 승리를 인전하는 것”이며 “한국인과 유엔 여러나라 국민을 살해한
적을 용서하고 한국땅을 또 쪼개어 전쟁의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자식들을 바친 부모들에게
뭐라고 할말이 있겠으며 이런 정치적 과오가 재차 전쟁을 부를 것”이라고 반발하였다.

★다급해진 이승만이 격분한 국민들을 진정시키며 일으킨 국민 총궐기 시위가 폭발하였다. 
4월4일 국회는 유화적 휴전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고 임병직 유엔대사와 양유찬 주미대사는
미국에서 연일 ‘통일 없는 휴전 반대’를 외치는 연설을 이어나갔다. 

4월1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에 대하여 ‘평화달성 5개조항’을 제안한 중대방솔을 하자

대한민국 국회는 22일 ‘북진통일 국민운동 전개’를 결의하고 국회와 시민공동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 국회 문을 닫고 국회의원들이 직접 거리에 나와 총궐기 행진에 참여한다.
4월24일 양유찬 주미대사는 미국 정부에 “분할휴전 결사반대, 단독 북진”을 통고한다.
쌍방의 상병포로들은 하루 800명씩 교환, 유엔측에서 북한군 5,100명과 중공군 700명을 보내고 공산측에선 겨우 한국군450명 유엔군 150명만 보내왔다.

★5월1일 이승만은 경무대로 기자들을 불러 ‘불한군 포로 외국이송 반대’를 재천명한다.

“귀국을 원치않는 중공군 포로들에 대해서는 상관치 않겠으나 북한 출신 포로만은
한국 이외의 어떠한 제3국에도 이송하는 것을 절대 반대하는 바이다.”

5월3일 이승만, C군단 창설식에서 “국토분할 휴전 절대 반대” 연설.

5월8일 변영태 외무장관 “완충지대는 국경선 밖에 설치하라. 한국.영토내 설치는 절대 불가”

5월11일 이승만 ‘현상 휴전은 20일도 지속 불가능, 단독으로 북진 결행하겠다’

“한국의 2천만 국민은 북한땅에 중공군이 남아있는 채로 성립되는 어떠한 휴전도 거부한다.

한국은 언제라도 필요하면 단독으로 전투를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결정을 이미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에게 정식으로 통보하였다. 나는 한국 통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어떠한
휴전도 한국정부와 국민으로서 결코 수락할 수 없다는 것을 미국정부에 전달하였다.“

▲ 준비상경계령을 선포, 이대통령 강경태도에 워싱턴 당황 등.ⓒ동아DB



▶ 덜레스 미국무장관, 공산측 제안 수락 용의 발표


[워싱턴10일발 INS=합동] 미국 덜레스 국무장관은 9일 주한미군과 동맹군은 공산군측이 성실한 설명을 해준다면 공산군측의 휴전 제안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조선일보 5.12).
덜레스가 ‘성실한 설명’을 요구한다는 공산측 제안은 다름 아닌 송환거부 포로(반공포로)의 중립국 이관문제이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이때까지 중공군 포로들은 중립국에 보낸다해도 북한군 반공포로들은
이승만의 주장과 같이 휴전협정 조인과 동시에 한국서 석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왔다.
그러나 북한 남일은 북한군 반공포로들이야말로 중공군과 똑같이 중립국에 넘겨서 석달 내지 1년가까이 수용 설득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결국 반공포로들을 고문하고 지치게 만들어 북한으로 송환하겠다는 속셈이다. 이를 비난해온 미국측은 공산당 치하로 가기 싫다는 반공포로들을 그냥 보낼 수 없는 과거의 악몽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 제네바 협정(일괄송환)과 인도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한국 편을 들고 있는 입장이다.
과거의 악몽이란,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미군이 독일군에서 인수한 소련군 포로 4천800명이
본국송환을 거부하는데도 소련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강제 송환하였을 때 일어난 비극을 말한다. 포로를 가득 태운 열차들이 오스트리아 산악지대를 지나고 있을 때 일어난 돌발사태, 포로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계곡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 탈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탈출이냐 자살이냐 다툼도 있었지만 '죽어도 가기 싫다'는 반공 고발, 그들은 대부분 사망하여
4천여명이 집단 투신자실한 대참사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소련이 유화적 태도로 돌변한 지금, 대선 공약인 한국휴전을 지켜야하는 아이젠하워에게는 스탈린의 죽음이 인도주의와 무관하게 협상성공을 가져오는 행운의 선물이었던 셈이다.


▶이승만, 연일 비상각의...'한미상호방위조약' 먼저 체결하자"

[진해발] 이대통령은 30일오전11시경 진해별저(別邸)에서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이 이대통령의
휴전반대 대태도를 완화하기 위하여 브릭스(Ellis Briggs) 주한미대사를 통하여 전달했다는 중대서한에 대한 답장문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이 진해별저에는 변 외무장관과 이대통령 부인만이 동 회한문 작성을 보조하였가도 전해지고 있다. 내외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역사적인 국무회의는 이대통령 임석하에 1일 오전9시40분부터 극비리에 개최되었다. 

5일전 브릭스 대사에 의하여 서울서 이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는 아이젠하워 미대통량의 친서와 휴전문제에 대하여  3시간에 걸친 각의을 마치고 나온 변영태 국무총리서리 겸 외무장관은 토의 내용에 대하여 일제 언급을 회피하였다. 이대통령은 회의내용의 기밀누설을 엄중히 금하였다한다. 변 장관은 기자들에게 “국토를 분단하고 중공군이 북한에 남아있는채로 그런 조건하의 휴전을 결사반대하는 한국정부의 방침에는 추호의 변화도 없다”는 것을 다시금 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리고 국군은 동맹국의 지원없이라도 능히 단독으로 작전을 계속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일부에서는 유엔군이 탄약 보급을 끊으면 국군은 전투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나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조선일보 보도)

이처럼 날마다 비상각의를 개최한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한국측 대한 3개항과 친서 내용을 잇따라 국민에게 공개하였다. 

▲ '휴전전에 안전보장이 선결'을 연일 주창하는 이승만 대통령.ⓒ조선DB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 요지> 휴전 후에 조약 맺자

[공보처 7일하오7시 특별발표] 이대통령은 7일 하오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대장과 주한미국대사 브릭스씨를 통하여 아이젠하워 미대통령으로부터 장문의 서한을 접수하였다.

이날 공보처는 이대통령의 특명에 의하여 동 서한 전문을 공표하였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미국은 모든 평화적 수단으로써 한국통일을 달성하겠다는 노력을 단념치 않는다.
휴전 후 열릴 정치회의에서 확고부동한 결의를 견지하도록 노력함, 한국정부의 참여 기대.

2. 상호방위조약은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수락된 후에 호주, 뉴질랜드 간에 체결된 조약과
동일성격의 방위조약을 협상할 용의가 있다. 이 조약은 현재 또는 금후 평화적으로 대한민국
통치하에 들어올 영역을 적용대상으로 하며.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3. 국회의 예산 승인 범위에서 대한민국에 경제원조할 용의가 있음.
이상의 목표는 전란이나 새로운 모험을 통해 달성할 수 없고 오로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 휴전 성립과 동시에 대한민국과 손을 잡고 목표 추구활 용의.

대통령 각하, 나는 대한민국과의 제휴관계를 증진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소망이라는 것을 이에
확언코자 한다. 이와같은 위기에 있어서 결별한다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도 일체가 되어야 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요컨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휴전협정 조인 후에 체결하자는 것, 단독북진등 ‘새로운 모험’을
해선 안된다는 것과 한미양국이 ‘결별’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 즉 미국 말을 듣지 않으면
한미관계는 끝장이라는 ‘협박’까지 곁들인 친서였다.

“한미방위조약 체결이 선결!” 한국측 대안 3개항 발표

[공보처 특별발표] 이대통령은 6일 오전11시 한국휴전문제에 관한 정부의 입장을 천명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유엔군이 제출한 신제안은 본정부에서 접수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우리가 대안 제의를 제출하니 공산군과 유엔군이 일시에 한국에서 철퇴하자는 것인데 이 안건을 실시하기 전에  한미양국간에 공동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이며 공동방위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포함하자는 것이다.

1. 한반도를 어떤 나라에서나 혹은 어떤 나라이나 침략할 때에는
   미국이 한국과 합동방위를 자동적으로 즉각적으로 행할 것.

2. 미국은 한국에 무기와 탄약과 병참물자를 충분히 보급해서 한국이 국방을 상당히 완비하여
   미국시민이 한국에서 참전할 필요가 없도록 할 것.

3. 미국의 공군과 해군은 지금 있는데서 주류해서 적군이 다시 침략을 시도하지 못할만한
   정도까지 한국국방을 축성하도록 계속할 것.

그러나 본 제안을 협동할 수 없다면 싸움을 계속하게 허락할 것이니 어떤 휴전조약이나 평화조약으로 한국의 분할을 계속하게 하는 것 보다 우리는 싸움으로 결정하는 것을 택하기를 낫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로이 우리의 원하는 바를 말하자면 연합군이 우리와 같이 계속해서 이 공동문제를 싸움으로 판결하자함인데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민족자격주의의 권리를 행사해서 우리의 사활문제를 양단간에 판결하는 것을 낫게 생각하는 바인데 좌우간에
우리로는 이렇게 분열된 형상으로는 더 살 수 없는 형편임을 각오하는 바이다.
 (조선일보 호외 재록)

이승만의 요구는 초지일관이다. 통일 없는 휴전을 수락할 수 없다는 것,
휴전하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먼저 체결해야한다는 것, 미국은 유럽의 나토(NATO)와 똑 같이 한국이 침략받을 때 ‘자동적으로 즉각 개입’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이와같은 한국요구를 거부한다면 단독으로 싸워서 통일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재확인 다짐하는 제안이다.

▲ '통일없는 휴전 결사반대'를 부르짖는 전국 시위.ⓒ조섡DB



▶ 전국민 실망 최고조에...“총궐기 비상령”...도미 장병들 소환명령

“이승만 대통령은 7일오전 특별담화를 발표, “최악의 경우 단독북진할 것이니 한국국민과 육해공군은 정부 명령에 따르라”고 선언하고 “새로운 침략 방지를 보장하지 않은 채 휴전협정을 성립시킬 경우에는 공산군과 전쟁을 계속하도록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진헌식 내무장관은 이날 오전
한국전토에 준비상경계령을 선포하였다.

한편 공보처의 특별발표에 의하면 정부에서는 현하 긴박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현재 도미중에 있는 육군총참모장 백선엽 대장이하 육해공군 전장교의 즉시 소환을 명령하는 동시에
현재 도미 예정중이던 각 장성들에 대해서는 출발 중지를 명령하였다.“ (동아일보 6월8일자)

이튿날 이대통령은 아이젠하워대통령으로부터 전달된 미국의 양보는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명백히 선언하였다. 8일 미군 제1군단의 참전1천일 기념식에 참석하여 행한 연설에서
이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제안에 대하여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밝히고
“나는 슬픈 감정과 무거운 심정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고 말하였을 때 그의 목소리는 눈물에
떨려서 거의 들을 수 없었다고 조선일보는 보도하였다.

이어 다음날 변영태 총리서리도 “전민족은 궐기하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휴전을 반대하며 다만 북진통일만을 바란다는 민족의 염원은 요원의 불꽃처럼 방방곡곡에서 일어나고 있는 열렬한 데모로 유감없이 표시되고 있거니와 12일 부산에서 거행된 상이군인 데모에 이어 수도 서울에서는 팔다리와 눈을 잃은 상이군인들의 대대적인 데모를 비롯하여 남녀 중고 학생들의 시위행진이 성대히 거행되었다. 

*“진격명령을 내려주시오” 재경상이군인들의 혈서 메시지

*미국대사관 주변에 철조망, 소방차로 길을 막아 시민 통행을 금지

*국민은 자중하여 외국군에 신중하라, 교통 방해등 일체 금지

*전국민의 실망 최절정에 올라...이대통령은 시위대에 격려 메시지.(이상 동아일보)

▲ 부산 서울등 곳곳서 '북진 혈서'를 썼다.ⓒ조선DB



 미국, 굴욕적인 양보...반공포로들의 중립국 이송에 동의

강제 일괄송환이냐? 자유선택 송환이냐? 휴전협상을 1년넘게 가로막았던 포로송환문제가 드디어 합의에 도달하였다. 강제송환을 고집하던 공산측이 소련 정책변화에 따라 인도의 절충안에 찬성하고, 반공포로의 즉시석방을 줄곧 주장하던 유엔측이 갑자기 이를 철회하였기 때문이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중립국 소위원회는 스위스, 스웨덴, 체코, 폴란드, 인도 등 5개국으로 하고
   송환거부 포로들은 한국내에서 관리한다.

2) 인도만이 필요한 병력을 파견하고 기타 4개국은 50명 내외의 보좌관만 파견한다.

3) 송환을 이행 또는 저지하기 위해 포로를 위협하거나 무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4) 송환포로는 휴전후 60일 안에 보낸다.

5) 송환거부 포로의 소속국은 송환에 관한 모든 사항을 설명하기위해 90일간 그 대표를 포로막사    에 파견할 수 있다. 

6) 포로설득은 중립국위원회 각국으로부터 1명의 대표자가 입회한 자리에서 실시한다.

7)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이관되어 있는 동안 귀국키로 결정한 포로들은 위원회의다수결로 그 결정    의 비리를 판단한 다음에 송환한다.

8) 90일이 경과한 후에도 귀국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정치회의에 위탁한다.

9) 정치회의가 30일간 토의한후 그래도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민간인으로 석방한다.
   그후 포로가 희망한다면 중립국에 갈 기회를 부여하되 중립국 이송은 30일안에 끝낸다.

10) 송환위원회 및 부속기관은 다수결에 의해 운영된다. 중립국위원회는 120일 안에 해체한다.

이렇게 해서 장장 1년 11개월만에 휴전협상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체 정전협정의 서명뿐이다. 아니 진짜로 남은 일은 이승만 한국대통령의 수락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이승만 편에 서서 반공포로의 인도주의를 동의해왔던 클라크 사령관은 난감하였다.

6월8일 서명절차를 남겨둔 6일, 도쿄에서 날아온 클라크는 옆자리 최덕신을 돌아보았다.

“제너럴 최, 비행기에서 내리면 기자들이 달려들 텐데 당신은 아무 말도 하면 안되요.
 내가 직접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설명드릴 것이오” 클라크의 당부 말을 듣는 최덕신은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결국 그렇게 결말이 나는 모양이다.

판문점 협상의 한국군 대표 최덕신은 열흘 전 5월 25일 유엔측이 자신을 따돌리며 굴욕적인
‘양보’를 공산측에 건넨 문서를 발견하자 “안되요” 소리치며 회담장을 뛰쳐나왔었다.
처음부터 주장해온 조건 <반공포로는 휴전 즉시 석방한다>는 조항을 유엔측이 하루밤새 삭제하였던 것이다. 퇴장한 최덕신은 이대통령에 보고하였고 분격한 이승만은 아예 회의 참석를 보이콧 시켰던 터이다. 최덕신 만이 아니다. ‘5.25 굴복’ 이후 옵서버 역할을 해온 참모 이수영 대령도 문산 평화촌을 떠났고. 문산서 일하고 있던 김일겸 해군준장도 서울로 철수해버렸다.

▲ '휴전 강요는 사형선고'라며 미국에 정면 도전한 이승만 대통령.ⓒ조선DB



이승만  "분단 휴전 강요는 사형선고...우리가 싸워서 결판 내겠소"

서울에 도착한 클라크는 브릭스 미국대사와 만나 경무대로 향하였다.

만78세 노대통령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북진통일’ 혈서와 결의문등이 쌓여있었다.

클라크는 아이젠하워의 새로운 친서부터 전하였다.
그 내용은 한국군 20개사단과 공군-해군 보강과 ‘공산군이 휴전협정을 위반하여 공격하면 유엔 16개 참전국과 합동으로 대항한다’는 것을 공동성명으로 보장한다 등이었다.
한미방위조약 이야기는 빠져있었다.

그동안 여러차례 이승만과 협상아닌 협상을 거듭해왔던 클라크는 ‘탄약고로 타들어가는 불붙은 도화선’처럼 어떤 휴전도 파탄내겠다고 벼르는 이승만이 지혜가 깊고 예지력이 탁월한  국가원수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다고 회고록에 썼듯이, 예상대로 흥분에 떠는 노대통령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피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나갔다. 변영태 외무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우리의 최종안(반공포로 즉시석방의 철회)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친 감정적 영향은
너무 컸다. 나는 그가 그처럼 난처해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의자에 똑바로 앉아 청년시절 감옥에서 고문받아 화상을 입었던 손가락들을 후후 불며
비벼대고 있었고 얼굴 근육은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곤 했다. 그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약을 애써 눌러 참는 모습이었다. 브릭스와 내가 번갈아 휴전과 원조의 계획과 약속을 설명하는
도중에 그는 말을 가로막으면서 소리쳤다.
‘나는 대단히 실망하고 있소. 당신네 미국 정부는 자주 태도를 바꾸고 있소.

당신네들은 한국 정부의 견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소.‘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면서
’당신들의 위협은 우리에게 효과가 없소. 우리는 살고 싶소. 우리는 생존하고 싶은 거요.
우리는 우리 운명을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이오. 미안하지만 이러한 사정아래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조를 약속할 수 없소.‘라고 부들부들 떨며 말을 토하였다.
변 장관은 만약 포로를 강제송환한다면 반공포로의 많은 수가 자살을 택할 것이라고
또렷한 옥스퍼드식 영어로 경고하였다.
 2시간 넘는 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한국 속담을 인용해가면서
’인도군 병사는 한 사람도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하지 않겠다는 뜻을
아이젠하워에게 서한을 보내 설명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상은 클라크 장군이 뒷날 회고록에 기록한 대목을 옮긴 현장표정이다.

“내 친구 아이크에게 전하시오. 휴전반대는 내가 선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간절한 소원에서 나오는 것이오.
우리동포 포로들을 남의 나라에 넘기고 국토를 중공에 팔아넘기는
이런 휴전을 수락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오.
당신네 대통령에게 말하시오. 우리 국민들은 단독으로 싸우기를 원한다고...”

주름진 8순 노인 얼굴은 절망과 분노에 말을 끝내지 못한채 젖은 눈이 불을 뿜었다.

이날 회담의 뒷이야기를 취재한 AFP통신은 워싱턴 당국이 상당히 당황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회담 분위기는 험악하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두 미국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대화내내
자기 권총을 붙잡고 있었다”고 전한 이 통신은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먼저 한미상호방위협정이 조인되지 않고 휴전협정이 체결된다면 한국군은 계속해서 싸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데, 미국의 교섭자들은 이에 대한 확약을 줄수가 없었다고 한다”라면서
“국가운명을 강대국에 맡길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 약소국 대통령의 남다른 강고함에는 단1인치의 양보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관측통의 말을 덧붙였다.

▲ 한국을 떠나는 밴플리트 장군과 악수하는 이승만 대통령, 밴플리트 오른쪽에 신임 8군사령관 테일러, 이대통령 왼쪽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백선엽 장군.


미국, 한국에 "군사-경제 원조 끊겠다" 경고...에버레디 작전

회담직후 나온 또 다른 외신 보도는 미국의 ‘대한 원조 단절’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풍설로 나돌던 ‘원조단절’ 경고가 워싱턴에서 공직적으로 발표되었다는 뉴스다.

[워싱턴10일발INS=동양] 당지에서 9일 발표된 바에 의하면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만약 한국정부가 전투를 계속하겠다는 그들의 위협을 실천에 옮긴다면 식량을 포함하는 모든
보급이 단절될 것이라고 이승만 정부에 경고하였다고 한다.

클라크는 “한국측이 만약 ‘단독조지’를 취할 때에는 한국에 대한 모든 군사적 경제적인 원조가
끊어질 것”이라고 이대통령에게 직접 구두로 경고하였다.
한편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한국 국회는 유엔측 조건하의 휴전을 거부하고 국민에게 북진태세를 갖추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뉴욕15일발AP=합동] 뉴욕헤럴드 트리뷴지가 14일 보도한 바에 의하면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은 한국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한국에 의한 휴전협정의 침범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는 훈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지 워싱턴특파원 버드 랏셀 기자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클라크 장군에 대한 이 훈령은 이대통령이 휴전을 수락하도록 설복되리라고 워싱턴당국자들이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하여졌다고 한다. (조선일보)

이승만 제거작전 ‘Ever-Ready Plan’= 이 기사가 말하는 ‘휴전 침범방지에 필요한 모든 조치’ 가운데 핵심은 ‘이승만 제거작전’이 포함된다. 지난해 부산정치파동이 한창일 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계엄령해제요구에 불응하고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자 미국대사관의 요구에 따라 검토했던 강경개입 작전이다. 당시 미국무성의 재촉을 피하던 클라크가 구상한 작전 내용은 이렇다.

 1) 이승만을 서울 또는 다른 곳에 초청해 부산을 떠나도록 한다.
 2) 유엔군이 부산 일대에 진입하여 이승만 측근 5~10명을 체포하며
 3) 계엄지휘권을 한국육군참모총장을 통해 넘겨받은 다음 , 이승만에게 계엄을 해제하고 국회의     원들의 행동에 자유를 보장하는 포고문에 서명하도록 하며,
 4) 이승만이 거부한다면 그를 보호감금하여 외부와 차단시키고,
 5) 유엔사령부가 임시정부를 세우도록 강구하며,
 6) 이런 조치가 참전국들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이승만이 발표하도록 한다.

이상 클라크의 구상은 강경파의 ‘이승만 영구제거’ 요구를 물리친 온건책이었다.

이승만을 존경하며 군사개입을 극력 피하려던 클라크는 이 온건책도 뒤늦게 제출함으로써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미 트루먼 정부가 “이승만의 대타가 없다”고 결론 짓고 이승만 제거를 백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발췌개헌’ 즉 대통령 직선제 헌법이다.

휴전의 경우엔 그러나 많이 다르다. 참전국들은 물론 미국의 세계전략이 좌우되는 문제이다.

이승만이 만약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단독북진 전쟁이라도 일으키는 사태는 원천봉쇄 해야 하는 상황이므로 미8군사령관 테일러가 직접 새로운 작전 ‘Ever-Ready Plan’을 마련하였다.
작전이름처럼 언제라도 이승만을 ‘사전 제거’할 수 있도록 상비출동태세를 갖춰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아이크가 뒤에 취소하게 된다.

▲ 원용덕 헌병총사령관.


"반공포로 석방하라'...원용덕에 “可晩” 친필 명령서                                             

클라크 장군과 브릭스 대사가 최종 휴전안을 설명하며 진땀을 빼다가 돌아간 그날 오후, 

방문객들과 접견을 끝낸 이승만은 원용덕(元容德) 헌병총사령관을 경무대로 불렀다.

바로 작년 부산정치파동때 부산지역 계엄사령관이 되어 결정적인 역화를 도맡았던 대통령의 심복이다. 평소 원용덕의 무인다운 애국심을 좋게 본 이승만은 그때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서 육군편제에도 없는 헌병사령부를 만들어 사령관을 맡겼었다.

원용덕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승만은 비서들을 물리치고 바싹 다가앉으라 했다.

“이봐, 원 장군. 미국 사람들이 우리 애국청년들을 죽음의 땅으로 보내려하니 큰일이야.

나로서는 한사람이라도 우리 아이들을 북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러니 원 장군, 반공포로들을 석방했으면 하는데 그 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도록 해줘.

오늘 밤중이라도 괜찮아. 정해지는 대로 어서 들어와서 알려주어 해.“

반공포로 석방! 원용덕은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몇 번인가 그동안 이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은 석방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던 터라
두말없이 “네, 각하!” 힘차게 답하였다.

문제는 상부조직만 있을뿐 병력이 없는 헌병사령부가 유엔군이 관리하는 포로들을 석방시켜하는 것, 병력동원 지휘권도 유엔군사령관에게 있고 육해공군 헌병사령부도 유엔군 산하이다. 

그런데도 대통령 명령엔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정신, 한마디 질문도 없이 신당동 집에 돌아온 원용덕은 포로석방 비밀명령이 곧 우방 미군과 싸워 애국청년들을 구출하는 구국명령임을 새삼 깨닫고 숙연한 감개에 젖었다고 한다. 나도 원했던 일, 내가 해내고야 말리라!

포로송환방법을 둘러싼 대치상태가 계속되면서 제네바협정을 익혀두었던 원용덕은
금방 머릿속에 ‘석방 작전’ 윤곽이 그려졌다. 진헌식(陳憲植) 내무장관부터 찾아갔다.
지방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일, 탈출한 포로들이 갈아입을 옷과 숙식문제,
미군과의 문제밠생 처리등을 협의하고 경무대로 달려갔다.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 원용덕을 보자 이승만이 반겼다.

“각하, 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만 포로수용소를 접수하려면 육군 헌병들이 필요한데
 제겐 지휘권이 없잖습니까? 도와주십시오.”

“그렇군.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나?”

“저에게 육해공군 헌병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내려주십시오. 꼭 성공시키겠습니다.”

원용덕은 미리 작성해 가져간 문서를 꺼냈다.
‘오늘부로 모든 헌병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감을 명령함’.

“여기에 결재를 해주시면 이것을 가지고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다.”

이승만은 주저없이 문안에 ‘晩’이란 사인을 해주더니 새 종이를 꺼내 붓글씨를 썼다.

‘나의 명령이니 반공 한인 애국청년들을 석방하라. 可晩’ ‘晩’은 이승만의 ‘만’이다.

포로 석방명령서를 즉석에서 써준 이승만은 원용덕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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