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버전 보기

[특집]② 독일 통일 30년, 어제와 오늘
독일, 갑자기 찾아온 통일 이후 어떻게 살았나?
1871년 첫 통일 이후 나치 출현, 재분단, 다시 통일…국민들, 엄청난 비용 감내
[전경웅 기자]  2017-07-18 05:00:02
글자크기 확대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구글플러스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카카톡 공유 네이버블로그 공유

▲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에 몰려든 동독 주민들이 벽을 허물고 있다. ⓒ통일부 블로그 캡쳐.


1989년 11월 9일(현지시간)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공보 담당 샤보프스키가 “지금부터 동서 베를린 간의 통행이 자유”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한국에서는 이를 ‘독일 통일’이라 부르지만 국제 사회는 ‘2차 독일 통일’이라 부른다. ‘1차 독일 통일’은 1871년 지금의 독일과 프로이센, 알자스·로렌 지역이 합쳐진 것이다. 당시 통일을 주도한 것은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이었다.

한반도와는 다른 독일 분단 과정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재상의 프로이센은 ‘통일 독일제국’을 만든 뒤 주변국과 계속 갈등을 빚는다. 그 결과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이었다. 전쟁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책처럼 지루한 참호전과 포격전, 화학무기 사용으로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4년 만에 끝났다.

‘통일 독일제국’은 승전국들과 맺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거액의 배상금을 내게 됐다. 제국은 황제 일가가 쫓겨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국민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는 정책을 폈지만,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1929년 10월 24일 美뉴욕 증시가 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은 독일 국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통화 정책으로 독일 경제를 살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밑거름이 된다.

집권한 ‘나치당’은 ‘제3제국’을 선포하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지불 거부, 강력한 사회통제와 함께 아리안 순혈주의를 내세우며, 유대인과 집시, 동성연애자, 외국인 난민 등을 탄압했다. 그리고 1939년 이탈리아, 일본과 동맹을 만든 뒤 유럽 정복을 시행한다. 시작은 폴란드를 침공이었다. 이후는 잘 알려진 대로다. 

▲ 1932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집권당 당수가 된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당시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유대 버추얼 도서관 화면캡쳐.


‘통일 독일제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제3제국’으로, 다시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지게 된 이유는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국제적 환경도 큰 원인이 됐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5대 연합국은 독일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도록 독일 영토를 4등분해 각각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군정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1945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곳은 서독, 다른 4분의 1은 동독이 된다. 

단순히 영토를 4등분한 뒤 군정을 통치했다면 베를린은 동독 영토가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베를린 분할을 요구했다. 소련은 여기에 반대했다. 소련은 1947년 냉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베를린은 모두 동독 땅”이라며 서베를린의 진출입을 모두 막았다. ‘베를린 봉쇄’였다. 1948년 6월 24일부터 1949년 5월 12일까지 계속된 ‘베를린 봉쇄’는, 처음에는 소련이 베를린 전체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이 군 수송기를 동원해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모두 공급하면서 무산됐다.

당시 미국은 매일 수송기 1,000여 대를 동원해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5,800톤의 각종 물자를 공급했다.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하루 필요한 물자는 3,600톤. 서베를린 시민은 남는 물자를 비축했다. ‘베를린 봉쇄’가 풀릴 때까지 미국은 27만 8,000회 비행을 통해 230만 톤이 넘는 물자를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보냈다. 사탕, 초콜릿, 우유 등 아이들 간식도 포함돼 있었다.

이를 본 소련은 당시 능력으로는 미국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 동독 영구통치 속셈을 드러낸다. 승전국끼리의 합의를 깨고 동독을 세운 것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나머지 지역에 서독을 세운다.

통일 전 동·서독의 인구·경제·군사력 차이

미국은 1947년 6월 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화된 유럽 각국과 부흥계획을 두고 논의한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 생산량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유럽 전체를 부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 美정부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시행한 유럽 부흥계획 '마셜 플랜'의 선전용 포스터. ⓒ슬라이드 쉐어 닷컴.


미국은 유럽 부흥계획을 세운 조지 마셜 美국무장관의 이름을 따 ‘마셜 플랜’이라 부른다.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도 “정치적 개혁과 외부 감독을 받겠다면 ‘마셜 플랜’ 대상국에 넣어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소련은 거절한다. 동유럽 공산화가 실패할까 우려해서다.

결국 미국은 서유럽만을 대상으로 부흥원조를 해준다.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이 ‘마셜 플랜’에 투입한 비용은 130억 달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300억 달러 상당이라고 한다. 서유럽 국가들은 1950년대에 전쟁 전의 경제 수준을 회복한다. 그 중에서도 독일은 특별히 미국과 호흡을 맞추며 경제 부흥에 성공, 20년도 안 된 사이에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며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린다. 서독은 1972년 뮌헨 올림픽, 1974년 FIFA 월드컵까지 유치한다. 1970년대 후반에는 GDP 세계 2위를 달성한다.

이처럼 발전한 서독은 1989년 초 기준으로 35만 6,000㎢의 국토에 6,260만 명의 인구가 사는, 미국 다음 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인정받게 됐다.

동독은 동구권 내에서는 소련에 이어 2위의 경제 강국이었다. 1949년 10월 7일 선거를 통해 ‘독일민주공화국’으로 시작한 동독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비교해 월등한 경제력을 보유했다. 1984년 동독의 1인당 GDP는 9,000달러로 서독의 1만 1,000달러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며, 1988년에는 1인당 GDP가 9,679달러로 당시 한국의 2배 수준이었다.

1990년 공식 통일 당시 10만 8,000㎢의 영토에 인구 1,600만 명이었던 동독은 통일 전까지는 꽤나 부유한 나라로 생각됐다. 특히 소련에 280억 달러의 2차 세계대전 배상금을 지불한 뒤에도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점, 사회주의 국가들의 특성상 스포츠를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한 덕분에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스포츠 국제대회에서 소련, 미국에 이어 2~3위를 항상 차지한 점이 국제사회의 눈길을 끌었다 때문에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모범’처럼 여겨졌다.

동독 경제성장은 그러나 ‘공산당의 선전’에 불과했다. 냉전 당시 소련은 동구권 국가들에 석유, 천연가스 등을 거의 무상에 가깝게 공급했고, 무기들 또한 저렴한 가격으로 수출했다. 그 덕분에 국민들에게 풍족한 생활을 제공할 수도 있었지만, 공산주의 사회 특유의 계획경제체제 때문에 경제 시스템이 극도로 비효율적이어서 생필품과 같은 경공업 제품 품귀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고, 열대 과일 등은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 2차 세계대전 이후 4분할된 독일. 이후 공식 지표로 드러난 동독의 발전상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듯 했다.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통일 이후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를 살펴본 결과 실제 동독 경제나 국력은 발표한 것과 비교해 형편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4년 6월 27일 염돈재 성균관大 교수가 국민통일방송을 통해 발표한 데 따르면, 1989년 초를 기준으로 서독의 GDP는 12조 2,452억 마르크, 동독은 2,837억 마르크였고, 1인당 GDP는 서독 2만 558달러, 동독은 9,703달러, 무역규모는 서독 6,111억 달러, 동독 470억 달러 수준에 불과했다.

독일 통일 이후 암시장에서 서독 1마르크로 바꾸려면 동독 4마르크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서독과 동독 간의 경제 격차는 명목 상 수치보다도 몇 배는 더 컸다고 봐야 한다.

통일 이후 동독이 자랑했던 스포츠 또한 금지약물인 스테로이드를 선수들에게 복용하게 한 덕분으로 드러났고, 공산당 수뇌부의 부정부패 또한 서유럽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동독의 군사력 또한 서독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었다. 1989년 초 서독 병력 수는 49만 5,000여 명이었던 반면 동독은 16만 6,000여 명에 불과했다. 1988년 기준 서독의 국방비는 684억 달러, 동독은 116억 달러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군인의 인건비와 무기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점을 고려해도 동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소련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동독에 전술 핵무기와 대규모 기갑부대 등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통일 전까지 20년 넘게 교류했던 동·서독

서독과 동독이 한반도와 또 다른 부분은 ‘장벽’이 비교적 늦게 건설됐고, 그로부터 10년 이후에는 상호 교류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한국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2km 지점까지를 비무장 지대(DMZ)로 설정하고, 민간인 출입 자체를 막았다. 반면 독일은 동·서독으로 나뉜 뒤에도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될 때까지는 삼엄하게 경계를 펴지 않았다.

서독판 ‘햇볕정책’이라 부를 수 있는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은 1963년부터 시작됐고, 1969년 9월 서독 연방선거에서 승리한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 연립 정부는 ‘新동방정책’을 펴겠다고 밝히면서, 본격적인 동·서독 교류가 시작된다.

▲ 1961년 소련이 건설한 베를린 장벽. ⓒ발터 P.루터 도서관 자료사진 캡쳐.


‘新동방정책’은 통일을 위해 동독과 협상하고, 동독을 포함한 동구권 국가들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조약 체결을 제안하고, 동독과의 무역 확대를 추진하고, 한국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전독성’을 ‘내독성’으로 개편해 동독과의 교류 협력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서독은 ‘新동방정책’을 통해 동독에게 상당한 액수의 재정적 지원도 제공했다. 특히 동·서독 간 교역에 대해서는 대출, 신용공여를 제공했고, 정부 간에도 거액의 차관을 제공했다. 이는 냉전이 최고조였던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서독은 그러나 동독을 조건 없이 지원하지는 않았다. 동·서독 민간분야 교류협력 확대, 국경 여행기준 완화, 베를린 장벽 등을 무단으로 넘는 사람들에 대한 총격 사살 금지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서독은 자국민은 동독에 연간 30일, 동독 사람은 서독에 연간 45일 동안 별도의 조건 없이 머무를 수 있게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대신 서독은 동독에게 자국민 통행료 및 도로 사용료를 일괄 지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서독이 동독에 지불한 통행료는 78억 마르크였고, 도로 사용료는 5억 마르크였다고 한다.

서독 정부는 또한 동독에 동·서독 간 소포배달, 통신선 설치를 요구, 1968년부터 관철시켰고, 우편배달 및 전화통화 전면허용을 요구해 1971년부터 시행했다.

이처럼 서독 정부는 막대한 재정지원에 동·서독 주민 간의 자유로운 이동과 교류를 요구, 관철시켰다 그 결과 서독 사람들은 자유롭게 동독으로 갈 수 있었고, 동독에서는 근로자가 아닌 노인 등은 비교적 쉽게 서독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서독 내에서 동독에 대한 환상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한국에도 알려져 있는, 동·서독 간 TV방송 시청은 1970년대부터였다. 그런데 그 시작이 매우 특이했다. 서독은 ‘新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전에는 우월한 힘을 통한 통일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동독 주민을 향한 TV방송과 라디오 방송을 계속 송출했다. 때문에 1950년대 후반까지 동독 가정의 80% 가량은 최소한 1개 이상의 서독 TV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독의 발전상과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한 동독 주민들이 동베를린으로 몰려들어, 몰래 서독으로 탈출하자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주민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세운다. 하지만 이후로는 역효과가 매우 커졌다. 서독 미디어를 통해 외부 정보를 접하려는 동독 주민들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이에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들에게 외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독일의 소리(DW)’와 ‘독일라디오(DLF)’ 방송을 세워 송출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반 서독은 동·서독 간 미디어 교류를 끈질기게 요구한다. 그 결과 1972년 11월 ‘동·서독 언론교류 관련 합의문’이 체결됐고, 12월에는 ‘동·서독의 상호 관계에 대한 기본조약’을 통해 양측이 서로 방송 송출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동독 주민들도 서독 TV방송을 볼 수 있게 되고, 동·서독 언론사가 서로 특파원을 주재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1976년 10월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 방송들이 서독 방송에 비해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동독 언론이 서독 언론과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

28년 동안 베를린 가로 막던 장벽, 깨지는 데는 몇 시간

1980년대 들어서는 동독 공산당 간부들이 공개적으로 서독 방송 내용을 언급하는가 하면, 동독 주민들이 서독의 실상을 아는데 유용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동독 공산당은 서독 방송을 통해 범죄, 시위 등을 보게 되면 동독 주민들이 ‘환상’에서 깨어나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때문인지 동독 정부는 공용 TV안테나를 설치하거나 유선 방송 등을 통해 주민들에게 서독 방송을 공급했다. 하지만 동독 주민들의 생각은 공산당과는 달랐다고 한다.

1980년대 레이건 美정부가 소련과 더욱 강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동·서독 간 교류는 위축되지 않았다.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표방하며 개방·유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데탕트’라고 명명된 동서 화해가 시작됐다.

‘데탕트’ 분위기의 절정은 1989년이었다. 6월 폴란드가 정치 자유화를 선언, 총선을 실시해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이를 시작으로 동유럽에서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급속히 퍼진다. 동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 열린 동서독 여행자유화 촉구 시위.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걸쳐 있던 철조망을 모두 해체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주민 1,000여 명이 헝가리로 여행을 떠난 뒤 그대로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다시 서독으로 향한다. 당시 민주화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 중이던 헝가리의 민주화 세력과 오스트리아의 왕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당주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이들의 서독 망명을 돕기 시작했다.

이들의 도움을 얻어 헝가리를 통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동독 주민들의 모습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이때 동독 주민들을 도와주는 헝가리 국경수비대의 모습은 동구권 국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동독을 탈출하는 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1989년 10월 3일 동독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폐쇄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는 7만 명이 모여 국경 개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은 당시 동독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의 출동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소련은 동독 정부가 군 병력을 동원해 유혈진압을 하려던 것도 막았다.

동독 공산당 내에서조차 호네커 서기장을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10월 17일 자진 사퇴한다. 10월 18일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에곤 크렌츠는 공산당 독재 하에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지만 오히려 더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는 100만 명이 모여 민주화와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1989년 11월 9일 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규제 완화’ 관련 법령을 발표한다. 당초 해당 법은 11월 10일부터 시행될 예정이었다. 마침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공산당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11월 9일 오후 6시에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브리핑을 한다. 귄터 샤보프스키 대변인은 이때 서류 내용을 잘못 읽었다.

“동독 주민은 외국 여행의 조건을 밝히지 않고 신청할 수 있으며, 해외여행을 할 때에는 동·서독 국경 또는 베를린의 모든 검문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원문을 “동독 주민은 베를린 장벽을 포함해 모든 국경 출입검문소에서 비자 없이 출국할 수 있다”고 읽었다.

브리핑에 참석한 기자가 “언제부터 이 법이 발효되느냐”고 묻자 샤보프스키 대변인은 관련 내용이 서류에 없었음에도 “즉시 발효된다”고 대답했다. 실제 내용은 해외여행 시 경찰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고, 외국 비자가 필요한 것인데 모두 생략된 것이다.

이 내용은 즉시 소문이 났고, 동독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간다. 국경경비대도 방송을 보았기에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후 10시 베를린 장벽 앞에는 수만 명의 주민들이 몰려와 국경 전면 개방을 요구한다. 국경경비대는 통제를 포기한다. 이윽고 장벽에 올라간 주민들이 벽을 깨기 시작한다. 자정을 넘겨 10일이 되자 주민들은 중장비까지 가져와 장벽을 허문다. 그렇게 베를린 장벽은 몇 시간 만에 동독 공산당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시작 빨랐지만 28년 후에도 마무리 중인 독일 통일

동독 공산당은 1989년 11월 10일부로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군대와 경찰은 손을 놓았고, 정보기관이자 주민들을 탄압하던 비밀경찰 슈타지는 시위대의 습격을 받아 모조리 파괴됐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던 동독은 11월 13일 기존 정부가 총 사퇴를 하고, 온건파 공산주의자 한스 모드로프의 주도 아래 통일을 위한 개혁을 시작한다.

12월 1일 동독 인민회의는 국가 내 공산당의 주요 역할을 제거했다. 12월 3일 에곤 크렌츠 공산당 서기장이 사임하고, 사흘 뒤에는 국가수반에서도 물러났다. 12월 7일 공산당과 다른 정당 간 원탁회의가 열렸고, 12월 16일 동독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 민주사회당으로 재창당한다.

▲ 1990년 10월 3일 독일 정부가 통일완료를 선언한 뒤 최근까지의 GDP 성장추세 그래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관련자료 캡쳐.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총선이 실시됐다. 공산당의 후신 민주사회당은 참패했고, 기독교 민주연합이 정권을 쥔다. 기독교 민주연합의 로타르 더 메치에어는 1990년 4월 4일 총리에 취임, 본격적으로 통일을 추진한다. 10월 3일 동·서독이 통일을 선언할 때까지 6개월 걸렸다. 그 사이 동독군은 서독군에 통합됐고, 공산당의 잔재들은 모두 철저히 제거됐다. 동독에 주둔하던 러시아군 40만여 명과 그 가족 20만 명의 철수는 9월 10일 합의에 따라 1994년 9월 1일까지 모두 철수했다.

다른 나라에 알려진 독일 통일은 대략 이렇다. 하지만 진정한 통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8년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통일 직후 서독 정부와 국민은 스스로의 힘으로 공산당 독재체제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동독 주민들을 존경심을 갖고 대했다. 하지만 그 존경심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이 화폐 등 경제, 군대, 사회제도를 통합하고, 동서독 사회를 형식적으로 합치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마음을 통합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입견과 편견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불과 40년 남짓의 분단이었음에도 모든 경제와 정치가 공산당의 계획에 따라 돌아가던 동독에서 살던 주민들에게 서독과 같은 체제에서의 생활은 두려움과 고통, 결핍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서독 주민들 또한 시장경제, 개인의 자유와 책임에 무지하고, 원칙을 지키지 않으며 권위주의적이고 게을러 보이는 동독 주민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에는 서독 주민과 동독 주민이 서로를 ‘동쪽 놈(Ossi)’과 ‘서쪽 놈(Wessi)’라고 낮춰 부르는가 하면 서로를 폄하하는 농담들이 돌기도 했다. 동독에서는 서독 주민들의 관용적 태도에 반발해 극단적 민족주의를 앞세운 ‘스킨헤드’ 조직과 히틀러의 나치 제국을 신봉하는 ‘네오나치’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서독 정부가 받아들인 무슬림 이민자와 아프리카 이민자들 때문에 자신들의 생활이 힘들다며 폭력을 행사하는 등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서독은 동독 재건과 사회 통합을 위해서도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다.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과 그 가족들의 이주 및 주거, 재교육, 취업 교육에 필요한 비용 120억 마르크도 서독이 부담했다. 독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05년까지 약 2조 7,000억 마르크(한화 약 1,750조 원)을 지출했다고 한다. 이는 연 평균 독일 연방 예산의 25~30%를 투입한 수준이다. 서독 국민 1인당 거의 10만 유로를 부담한 셈이다. 때문에 1989년 3.8%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던 독일은 1991년에는 전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 통일 이후 독일 동서 지역의 가계수입 추이. ⓒ쿼츠 닷컴 관련화면 캡쳐.


엄청난 통일 비용을 마련하면서, 독일 정부는 재정 적자를 부담하는 것으로는 모자라 국민들에게도 한시적으로 ‘연대세’라는 세금을 부과하고 유류세, 사회보험료, 담배세, 부가가치세를 인상했다. 때문에 독일 국민들의 가계 재정 압박이 심해졌다. 독일 재정 적자도 갈수록 쌓였다. 일각에서는 통일 비용 가운데 60%가 舊동독 주민들에 대한 실업급여 등 소비성 복지 예산이어서 통일 비용이 줄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서독과 동독 주민들 사이의 감정적 골이 깊어진 데는 이런 통일 비용 부담도 한 몫을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독일은 결국 해법을 만들어 냈다. 1998년 10월 취임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통일 이후 독일 사회는 과거와 같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사회개혁을 추진, 2003년 ‘아젠다 2010’을 발표하고 시행에 착수한다.

독일은 ‘아젠다 2010’을 시행한 지 3년째부터 경제성장률이 다시 3%를 넘기기 시작했다. 2005년 총선에서는 동독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기독교 민주연합 당수가 총리가 됐다. 2007년에는 경제성장률이 4%를 넘었으며, 재정적자 또한 GDP 대비 4% 아래로 떨어졌다.

▲ 통일 이후 독일 동서 지역 실업률 추이. ⓒKOTRA 관련자료 캡쳐.


7년 뒤인 2010년 독일 정부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되찾는 것은 물론 동·서독 국민 간의 감정적인 골도 치유했다고 평가받았다. 20년 동안 회자되던 ‘오시’와 ‘베시’ 농담도 사라졌다. 동독 지역은 여전히 실업률이 10%가 넘고, 수입도 서독 주민보다 20% 가량 낮지만, 통일에 대한 불만은 갈수록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⓷독일 통일-한반도 통일의 차이점’으로 이어집니다.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구글플러스 공유 카카오스토리 공유 카카톡 공유 네이버블로그 공유

관련기사
이전 페이지 바로가기
Copyright ⓒ Newdail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