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널드 토인비(Toynbee)는 문명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발생·성장·쇠퇴·소멸의 과정을 밟으며,  인간의 역사는 인류문명의 생성과 소멸과정이라 보았다. 그러나 각 문명의 생명주기는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을 띤다고도 했다. 한 문명의 운명은 창조적 소수에 달려있으니 그들은 도전에 대한 적절한 응전을 해내야하며, 그들의 모범을 대중들이 따르는 것을 ‘미메시스(모방)’라 규정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응전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 문명은 쇠퇴한다. 현재의 성공에 도취돼 새로운 도전에 안이하게 대처할 때 문명은 쇠퇴의 과정을 겪으니 토인비는 이것을 오만· 자아도취라는 뜻의 ‘휴브리스(Hubris)’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토인비의 계시적인 교훈은 문명 뿐 아니라 국가·사회·집단·개인에 이르기까지 적용될 수 있다.

  • 이러한 토인비의 주제는 여러 형태로 변주됐다. 예일대의 폴 케네디(Kennedy)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이란 책에서 이것을 제국(帝國)에 대입시켜 보았다. 그 어떤 제국도 영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케네디는 옳았다. 미국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쇠퇴시기를 너무 일찍 잡았다. 1980년대 욱일승천하는 일본과 서독의 기세를 보고 놀란 그는 미국의 시대가 빨리 저물 것이라 속단했다.

    여기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됐다. 그중 대표적인 예는 <지도할 운명>(원제: Bound to Lead. 한국에선 ‘21세기 미국파워’(한국경제신문사)란 제목으로 번역됨)이란 책에서 “미국의 전성기는 아직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한 하버드대학의 조지프 나이(Joseph Nye) 교수였다.

    1980-90년대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케네디의 의견을 더 지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최종결과는 나이의 압승이었다. 현재도 이 논쟁은 시간대와 차원을 달리해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쇠퇴와 중국대세론’은 하버드 대의 니얼 퍼거슨 교수가, 미국의 전성기가 더 갈 것이라는 예상은 저명한 국제정치평론가인 스트랫포의 조지 프리드먼 박사가 각각 이끌고 있다.

    한반도를 문명이란 키워드로 분석해본다면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중국이라는 압도적인 거대문명권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의 쇠퇴와 한반도의 1945년 해방 이후 남쪽은 의도했건 안했건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해양문명권의 영향을 받은 특수한 시기였고, 서구문명과 전통문명이 융합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유사 이래 최전성기를 구가했고,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부는 중국에 대해 큰소리치는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20여년을 구가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나니’ 많은 이들이 이제 그 전성기가 끝나간다고 우려한다.

    토인비에 대해 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한국이 바로 휴브리스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요?“라고 예리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1세기가 넘는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 다시 강력해진 중국에 굴종하는 사실상 신(新)조공 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얼빠진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 안팎으로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여기에 응전할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다. 그렇다면 힘들여 키워온 한국문명은 필연적으로 쇠퇴와 소멸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토인비가 얘기한 문명사의 철칙이었다.

    몇 년 전에 한림대 김인규 교수의 글에 인용된 아일랜드의 문호 윌리엄 예이츠의 ‘재림(再臨)’이라는 시에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부분을 읽다가 심장에 박히듯 각인된 글귀가 있었다.

    “최고의 인물들은 신념을 잃어가고, 최악의 인간들은 광기(狂氣)로 가득하네.”

    훗날 역사가들은 지금 이 시대를 ‘혼란의 시기’로 표현할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작금의 대다수 역사가들을 광기로 가득한 자들로 묘사할 것이다.

    사회를 이끌 현자(賢者)들은 매도되고 신념을 잃어가며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대신 좌건 우건, 최순실 집안이건 ‘최악의 인간’들이 광기를 내뿜고 판을 친다. ‘정의’의 이름으로 언론과 방송에서 증오와 거짓을 배설하고 선동하는 이들도 여기에 포함한다.

    대중은 현자를 ‘모방’하는 대신 무책임한 선동가들을 맹목적으로 따른다. 예이츠의 묵시록적인 시의 광경과 참으로 비슷하지 아니한가.

    눈을 돌려 한반도의 북쪽을 바라보면 훨씬 더 암울한 풍경이 펼쳐진다. 북한은 인류역사상 최악의 체제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다.

    조선왕조체제, 일본 천황제, 그리고 공산전체주의체제의 기묘한 혼합물에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울트라-민족주의가 가미된 세계문명사의 미아(迷兒)로 평가될 것이다. 거기에는 광기가 일상사가 된 세상이 있다. 그리고 그 체제를 동경하고 옹호하는 사람들로 넘치는 한국 여러 집단들의 광기가 결합된 이중의 장애물을 넘어야하는 도전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무력하다.

    이 혼돈의 끝은 어디일까? 문명사의 많은 경우처럼 외생적 충격으로 돌파구를 찾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 섞인 기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잠시 반짝였던 한국문명의 전성시대를 그리워하는 신세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

    한반도 남쪽에서 문명의 성장을 가져온 근본적인 이유를 모르고 이해 못하는 집단에겐 당연한 귀결일지니….

    강규형 (명지대 현대사)


    ※ 이 글의 원문은 조선일보 1월25일자에 실린 필자의 칼럼 <狂氣의 시대, 한국 문명의 쇠락?>으로, 필자가 직접 수정증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