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送 청소년들아,
    우리를 용서하지 마라



  •  
  • 신문에 난 그들의 얼굴이 눈앞을 가린다.
    이럴 때마다 우리네 손녀 손자들의 얼굴이 함께 겹쳐 보인다.
    이 행복한 아이들과 그들의 운명을 대조(對照) 하자니,
    표현하기 힘든 슬픔과 아픔과 분노가 솟구쳐 오른다.

    소년기와 청년기에 죽을 고생 다 하고 살았던 기성세대는,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서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 보람이 있어,
    오늘날엔 그 성취의 과실(果實)을
    자신들의 2세 3세들의 안온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위해 쏟아 붓고 있다.

    그러나 저 강제 북송당한 탈북 청소년들은,
    지금 쯤 차가운 감방 바닥에 쓰러져 누운 채 얼마나 참담한 심정에 빠져 있을까?
    왜 그들은 우리네,
    같은 또래 아이들처럼 카카오 톡을 쳐대며 깔깔깔 웃는 것이 그토록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탈북 어린이들을 잡아 넘긴 라오스와 중국 당국자들은,
    인도적 난민(humanitarian refugee)을 보호하라는 국제법 규범을 난폭하게 유린했다.

    그러나 더 큰 분노는 우리 정부와 외무부와 현지 외교관이란 사람들을 향해 퍼붓고 싶다.

    불가항력이라 할 작정인가?
    아니다.
    이는 그 동안 탈북 엑소더스의 역사적인 의미와 인간적인 비극에 대한,
    아무런 인식도 감동도 없이,
    그저 무감각한 채 매사 사무적으로만 처신해 온 관료주의의 필연적인 소산이다.

    관료에겐 심장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역사에 투신한다거나,
    감정이입(感情移入)을 한다거나,
    무엇에 일신을 걸고 개입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금기(禁忌)로 돼 있는 모양이다.
    그게 관료 노릇이라나.

    그런가?
    그렇다면 과거 서독 정부가 동독 사람들을 위해 취했던
    갖가지 일관된 적극적 방책과 조치들은 뭐였단 말인가?
    도무지 전략이 없다.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어쩔 수 없기 전에 성의 자체부터 없었다고 해야 맞는 말 아닌가?

    정부와 외교부 안에 탈북동포의 구출을 전담하는 팀도 없다.
    탈북자들 상당수는 이미 현지 대사관의 냉대와 무성의에 대해 여러 차례 증언한바 있다.
    이게 앞으로 통일을 해야 할 나라의 정부인가?

     대북 외교전의 위기대응 태세를 다시 짜야 한다.

    관료 팀과 활동 팀으로 나누든지 해서,
    이런 문제는 작전개념으로 활동 팀이 전담해야 한다.
    반질반질한 외교관 나리들만으론,
    탈북 엑소더스 같은 역사의 꿈틀거림을 다룰 수 없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방불할 위기국가요 투쟁 상태의 국가다.
    이런 국가는 그에 합당한 비상(非常)작전 전담 팀이 있어야,
    나라답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북송당한 청소년들아,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태세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이를 악물고 살아남아라.
    이담 만나면 욕부터 한 사발 걸게 하려무나.

    “그래, 그 동안 너네들 혼자 잘 먹고 잘 살았냐?”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