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는 자격은 어떤 보상 차원에서 주어져서는 안 될 뿐더러 운동권 정치세력은 이미 보상을 넘칠 만큼 받았다" "그들은 왜곡된 역사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고, 비현실적 이상사회건설을 꿈꾸며 그들만이 정의라는 선민의식에 빠져 나라를 사회주의경제, 전체주의적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심지어 대북관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드러내 국민들을 매우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언주 의원이 오늘의 기득권 세력 586에 대해 한 비판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이언주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당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 기간을 통해 그는 운동권 출신들을 근접 관찰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은 더 이상 그들과 동행할 수 없다는 발견이었다. 운동권이 내세우는 ‘민주’ ‘개혁’ ‘진보’ ‘통일’ 하는 등등의 개념들 자체는 사전적으로는 진선진미(盡善盡美)한 말씀들이다. 이런 성현(聖賢) 같은 말씀에야 누군들 “아니오”라고 감히(?) 말할 것인가?

     그러나 이언주 의원이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민주’는 자유를 삭제한 ‘그냥 민주주의’이고, 그들의 ‘진보’ ‘개혁’은 민중주의적 변혁이고, 그들의 ‘통일‘은 북핵 폐기 이전에 제재완화부터 해주자는 것이었다. 한-미 동맹보다 ’민족공조‘ ’우리민족끼리‘로 가자는 것도 아마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발견을 왜 처음부터 하지 않고 이제야 했느냐고 묻기보다는 필자로선, 그들과 야당 생활을 함께 했음에도 “아, 이들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구나”라고 자각한 것이 더 소중하고 대견스럽게 다가온다.
    누군가가 그 패거리에 가담하는 게 더 좋은가,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게 더 좋은가? 필자는 후자(後者)가 더 좋다. 운동권 수사학에 솔깃해 있는 많은 고학력 엘리트들과 대중들이 이언주 의원의 ’자각‘의 의미를 깊이 음미해주길 바란다.

     이언주 의원이 말한 ’반문(反文) 연대론‘에는 이런 저런 논의가 있을 수 있다. 토론과 논쟁은 그 자체로서 있을수록 좋다. 공감과 이의(異意)가 다 애국적 충정에서 나올 수 있다. 논의하다 보면 보편성 있는 접점도 나올 수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최근 자유민주 체제를 지지하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의 차별성을 인지(認知)하면서 그 모든 이들이 최소한 ’백두 칭송(稱訟)파‘와 그 통일전선 체인(chain)을 배척하고 그들과 투쟁하는 전선에선 함께 나설 수 있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함께‘란 단체가 하나라야 한다는 뜻이기 전에, 방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덜 된 생각이라면 반론은 하지 않겠다. 쓸모없는 ’틀딱‘ 하나가 혼자 골방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뿐이니 괘념할 것 없다.

     물론 앞에 나서는 사람, 중간에 서는 사람, 뒷줄에서 말없이 따라와야 할 사람의 차이는 있어야 할 것이다.
    ’반문 연대‘라는 말도 누가 선창 할 때는 좋아보이다가도 누가 ’나아아아도‘ 하고 나서면 별로 안 좋아 보이고... 하는 게 사실이다. 필자 세대는 뒷줄에서 말없이 따라가는 게 좋겠다. 아니면 연도(沿道)에 휠체어 타고 앉아서 박수나 쳐주거나.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8/11/15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