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회 이승만포럼]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대통령직선제 관철 통해 국가 리모델링"
  • ▲ 인보길 이승만포럼 공동대표(뉴데일리미디어그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홀에서 열린 제92회 이승만포럼에서 '6.25전쟁 중 이승만의 독립전쟁'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인보길 이승만포럼 공동대표(뉴데일리미디어그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홀에서 열린 제92회 이승만포럼에서 '6.25전쟁 중 이승만의 독립전쟁'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한국의 대통령 직선제를,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이어진 좌파운동권의 '민주화 데모'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직선제는 6·25 전쟁 도중 진행된 독립전쟁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도출해 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보길 회장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92회 이승만포럼-6·25 전쟁 중 이승만의 독립전쟁(부산정치파동에서 사사오입 개헌까지)'에서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거치고 반공포로 석방, 한미동맹 체결을 지나 사사오입 개헌파동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현대 정치사를 분석하면, 우리 헌법 제1조가 어떻게 실현됐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인 회장은 "건국 초기 강대국들은 국회 간선제의 허점을 이용해 '내정간섭'을 일삼았고, 그 과정에서 공산세력의 침투도 간과할 수 없었다"며 "우남 이승만은 강대국의 살해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기 위한 '투쟁'을 감행, 3년 만에 나라를 리모델링했다"고 강조했다.

    이날 포럼의 발표자로 나선 인보길 뉴데일리미디어그룹 회장은 자타공인, 우리나라 최고의 이승만 전문가다. 2010년 이승만연구소를 설립해, 매달 한 차례 이승만포럼을 열어오고 있다. 지난 8월엔 제11회 '우남 이승만 애국상' 본상을 수상했다.

  • ▲ 1951년 현 경남도청 인근의 당시 임시정부청사에서 6.25 1주년 기념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사진 속 현수막에 '북진이다. 삼천만 통일이다' 글귀가 보이고 그 밑에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이승만포럼 제공
    ▲ 1951년 현 경남도청 인근의 당시 임시정부청사에서 6.25 1주년 기념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사진 속 현수막에 '북진이다. 삼천만 통일이다' 글귀가 보이고 그 밑에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이승만포럼 제공

    "일방적인 휴전은 사형선고" 美 향한 이승만의 반기

    1952년 5월 25일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을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탄압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이 대통령이 '독재정권' 확립을 목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고, 이에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연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보길 회장은 "외견상은 대통령의 국회탄압이었으나, 사실은 미국과 이승만의 정면 대결이자, 미국으로부터의 독립투쟁이었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부산정치파동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그 이전 '개헌대결'이라는 권력구조 대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6·25가 한창이던 1952년은 대통령 간접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당시 야당이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세 번째 내각제 개헌안을 내놨다. 한민당은 건국전야에서부터 이승만에 반기를 들었다. 건국내각에 '총리+장관 6명' 입각을 요구했다 거부당한 것이 그 이유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승만은 '특정 정당이 독점하는 내각은 독재 위험성이 있고 새 정부는 북한 해방을 위한 통일정부가 돼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야당과 대립각을 세우던 때다. 동시에 미국과는 '휴전' 여부를 놓고 팽팽하게 맞섰다."

    인보길 회장은 "당시 야당은 이승만을 축출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즉 내각제를 확립해야 했다"고 말했다. 국제 상황도 '이승만 축출'에 힘을 보탰다. 당시 아이젠하워 美대통령은 '한국전쟁 중단'을 공약으로 당선됐기에 전쟁을 중단시켜야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했다. 인 회장은 "이승만이 얼마나 눈엣가시였겠냐"며 "미국은 한국 내 야당을 일방적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야당과 미국이 '배가 맞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으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52년 5월 25일 부산·영호남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이 탄 국회 출근 버스를 크레인에 헌병사령부로 끌고간 것인데,  40일간 지속된 이 파동에서 미국은 '당장 계엄령을 해제하라'며 압력을 가했으나 이승만은 '내정 간섭을 말라'며 국회의원들에게서 압수한 달러뭉치를 증거로 들이밀어 미국의 항의를 차단했다."

  • ▲ 인보길 이승만포럼 공동대표(뉴데일리미디어그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제92회 이승만포럼' 연사로 참석한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인보길 이승만포럼 공동대표(뉴데일리미디어그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제92회 이승만포럼' 연사로 참석한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부산정치파동에 앞서 1951년 12월 자유당이 창당됐다. 이는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는 이승만 세력들이 만든 정당이다. 이듬해 봄 전국 지방자치제 선거가 시행됐고 이는 자유당의 압도적 승리로 막을 내린다. 부산정치파동으로 '직선제'를 밀어붙일 수 있는 이승만의 정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그토록 '직선제'를 고집했던 이유는 뭘까.

    "간접선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가. 강대국 간섭을 불러들이고 공산당에게 먹힌다··· 명나라 지배받고 청나라 지배받고 러시아 지배받고 일본 지배받고, 그래도 모자라 미국 지배까지 받으려느냐.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직선제만은 실현해놓고 나가자는 것이 내 마지막 소원. 사대주의·당쟁 악습 뿌리 뽑겠다. 나를 믿어 달라." 

    당시 이 대통령이 자신보다 15~20세 어린 야당 국회의원들에게 호소한 것으로 알려진 발언이다.

    인보길 회장은 "당시 야당은 '간접선거 헌법수호'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승만을 '반민주 독재자'로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이승만은 독재자'라는 구호가 나온 최초 사례"라고 했다. 인 회장은 "그러나 이승만은 단 한명의 반대 정치인도 희생시키지 않았다"며 "연일 장문의 담화를 발표하며 민주주의 훈련방식을 택했다"고 했다.

    인 회장은 "끝내 미국 백악관 안보회의에서는 '한국 내 이승만을 대체할 지도자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승만과의 협상노선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인 회장은 이어 "미국이 손을 떼자 야당은 맥없이 굴복했고,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됐다. 이는 국회의원 손에서 대통령 선출권을 뺏아 국민들 손에 쥐어준 것이며 단군 이래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 선거"라고 강조했다.

  • ▲ 1954년 11월 29일 국회(현 서울시의회) 단상 모습. 한민당 관계자(왼쪽)가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당시 자유당 소속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있는 모습.
ⓒ이승만포럼 제공
    ▲ 1954년 11월 29일 국회(현 서울시의회) 단상 모습. 한민당 관계자(왼쪽)가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당시 자유당 소속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있는 모습. ⓒ이승만포럼 제공

    "사사오입, 변칙이지만 자유시장경제 확립한 계기"

    사사오입은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이 사사오입(四捨五入)을 주장하며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2차 헌법 개정 사건을 말한다. 부산정치파동에서 직선제 헌법을 만들어냈던 이승만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954년 11월 27일 제2차 개헌안을 상정한다.

    당시 국회 재적의원은 203명. 개헌정족수는 그 3분의 2인 136명이 나와야 하는데, 표결 결과 135표가 나왔다. 당연히 '부결'이 맞지만 '사사오입' 계산은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반올림하면 135명이 맞다"는 논리다. 이승만 정부는 반올림까지 하면서 무엇을 이루고자 했을까. 

    인보길 회장은 △국민투표제 도입 △경제조항 대폭 자유화 △국무총리 폐지 △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등을 꼽았다. 인 대표는 "당시 제헌헌법 경제조항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경제였고, 장관보다도 권한이 왜소한 총리는 국론 분열의 요소라고 판단됐다"고 말했다.

    인 회장은 "부산정치파동 등에서 '독재자'로 낙인찍힌 이승만이 왜 종신집권이 가능한 개헌까지 감행했는지 '역사의 당시성'을 현장 그대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며 사사오입 전후 정세 설명을 이어나갔다.

    "1953년은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동맹이 체결됐던 시기다. 소련의 스탈린에 맞서다, 휴전 여부를 놓고 미국과 정면으로 대립하던 이 시기는 한국이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공식조인한 해이기도 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단순히 국회비준만으로 발효되는 것이 아니고 비준서를 교환해야 발효되는데, 이승만은 비준서를 무기한 미뤘다. 휴전협정은 물론 통일문제·경제·군사원조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 인보길 이승만포럼 공동대표(뉴데일리미디어그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제92회 이승만포럼' 연사로 참석한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인보길 이승만포럼 공동대표(뉴데일리미디어그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제92회 이승만포럼' 연사로 참석한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인 회장은 "통일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린 제네바협상에서 미국은 북한이 제안한 '남북총선거'를 받아들였고, 이에 이승만은 격분해 '단독 북진통일'을 언급하며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인 회장은  이어 "전전긍긍하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국빈으로 미국에 초청했다. 해당 방미 협상의 결과 한국은 경제·군사 원조 10억 달러, 육군20개사단, 해·공군 대폭 증강 현대화를 얻어냈다. 끝으로 이승만은 마침내 비준서 교환에 동의, 그날로 한미동맹이 발효됐다"고 설명했다.

    인보길 회장은 "사사오입은 자유시장경제체제의 탄생"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지 겨우 1년, 철저히 파괴된 폐허에서 전후복구사업과 경제 부흥에 필요한 자금 마련, 야권의 권력쟁탈에 함몰된 국론분열상은 준전시 상태에 있던 한국에 치명적인 위기감을 야기하고 있었다"고 분석했다.

    인 회장은 "사사오입 변칙을 통해서라도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한 그 결단은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며 "1954년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이라는 자유민주공화국 세 기둥을 완성했다. 사사오입은 단순 독재개헌이 아니라 경제기적을 낳은 민주화 혁명"이라고 평가했다.

    끝으로 그는 "공산군·동맹국·사대주의·포퓰리즘과 싸우고 '독재자' 비난공세를 웃어넘기며 대한민국 구조를 리모델링한 이승만은 목숨을 내놓고 평생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여온 것"이라며 "이승만의 만77세부터 만79세까지의 3년, 이는 이승만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