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집단 최면 시키는 최대의 묘약
  •  “백성의 생활을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도자가 마침내 출현하신 것 아닌가... 경제발전과 민생의 향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북이) 변하는 것은 틀림없다... 모처럼의 평화의 기회, 북한의 지도자나 지도부에 있는 분들이 경제를 우선시하고 민생을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정책의 큰 전환을 이루고 있다면 그 기회를 살려드리는 게 좋다"

     정부 수뇌부의 이런 말을 들으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이 하나 있다. 말을 단순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대중을 집단최면 시키는 최고의 묘약(妙藥)이라는 사실이다. 괜히 유식하고 복잡하게 말할 필요 없다. 이건 이것이고 저건 저것이니라 하고 에헴 하며 한 마디 나직하고 젊잖게 던지는 게 대중을 뿅 가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북한 김정은이 핵무기와 대륙간탄도탄을 만들어 미국의 트럼프를 협상 파트너로 만들어 놓고 그 여력을 경제 쪽으로 집중하게 된 그간의 과정과 곡절과 사연이 그리도 기쁘고 좋고 잘된 경사(慶事)란 소린가?

     경제건설이란 것도 지금의 북한 체제를 고스란히 온존시켜가지고는 김정은 비자금 금고는 차게 만들 수 있어도 북한 주민 기준의 복리수준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주민 기준의 경제를 발전키기 위해서는 북한의 체제를 중국이나 베트남의 반(半)의 반 정도로는 바꿔야 한다. 시장을 합법화 시켜 최소한 2원적인(재래적인 것과 시장적인 것의 병존) 체제로 가면서 현대 시장경제가 수반해야 할 여러 가지 제도적 인프라를 미련해야 한다.


     주민의 이동의 자유를 넓히고 그들의 눈과 귀와 입을 점차적으로 족쇄에서 풀어주어야 한다. 정치범 수용소도 없애고 공개처형도 없애고 문화적 획일주의 통제를 제한적으로라도 누그러뜨려야 한다. 사람의 숨통을 열어줘야 경제든 무엇이든 나아질 게 아닌가?

    이런 변화는 단 1 밀리도 없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같은 체제를 그대로 둔 채 경제발전이라니, 이런 ‘악마의 성(城)’을 ‘발전’ 시킨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의(意義)가 있다는 것인가? 지옥을 발전시킨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가?

     그리고 뭐, 북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그래서 남-북 회담 이후에도 남쪽 동영상을 보거나 미니스커트를 입는 등의 ‘비(非)사회주의적 작태’를 그토록 쥐 잡듯 잡아 족치는가?

     이렇게 말하면 이게 곧 자유한국당 지도부 말대로 청산해야 할 ‘반공주의’이고 ‘수구냉전’이 되는 것인가? 김정은을 두고 “백성의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도자가 출현하셨다”고 말하면 ‘진보’가 되고, 고모부와 이복형 죽인 고얀 놈이라고 말하면 ‘수구냉전’이 되는가 말이다.

     자칭 ‘진보’란 측이 이렇게 말하면 또 모르겠는데 요즘엔 자칭 ‘보수’라는 일각에서도 이런 소리를 하며 스스로 ‘혁신보수’ ‘젊은 보수’ ‘합리적 보수‘라고 자처하니 자다가도 웃을 노릇이다. 도대체 히틀러, 스탈린, 김정은 같은 전체주의를 이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정공법으로 배척하는 걸 ’안보 보수‘ 운운 하며 배척하는 ’보수‘란 어떤 종류의 보수인가?

     경제와 일자리와 청년문화의 감수성과 실용성에 기초한 보수라야 젊은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건 일리 있는 이야기다. 필자도 거기까지는 동의하고 찬성하고 주장도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철학적 자유주의(philosophical liberalism : 버트란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에는 이에 관해 한 章을 할애하고 있다)의 대원칙에서 김정은 체제를 포함하는 일체의 아우슈비츠 체제 내지는 수용소 군도(群島)에 대해 분노하고 투쟁하고 배척하는 열정이야말로 젊었든지 늙었든지 간에 모든 자유-우파가 견지해야 할 가장 초보적인 ‘인증샷’일 것이라 생각된다. 이걸 마치 ‘틀딱’들의 시대착오적인 넋두리라고 치겠다면 마음대로들 하랄 수밖에 없다.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8/7/21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