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해명 기자회견, 또 다른 '미투(#MeToo) 고백' 불러와
  • "인정하지 않습니다. SNS에 올라온 글 중에서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실과 진실에 따라 심판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9일 한 극단의 대표와 전직 여배우의 폭로로 '성기 안마' 논란에 휩싸인 연출가 이윤택(67)이 성추행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오전 서울 명륜동 30스튜디오에 특유의 백발 머리를 휘말리며 나타난 이윤택은 "피해를 입은 당사자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그 어떠한 벌도 받겠다"는 사과 표명으로 회견을 시작했다.

    카메라 취재진을 상대로 90도로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사과의 인사를 건넨 이윤택은 "단원들이 항의를 할 때마다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했지만 번번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피해 당사자는 물론, 연극계 선후배에게도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진정성'이 엿보이는 사과 인사가 끝나자, 한 취재진이 "성추행 의혹에 이어 이번엔 성폭행 의혹까지 제기됐다"며 "해당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날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이윤택은 "인정할 수 없다"며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좀전까지만해도 "큰 죄를 지었다"며 납짝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던 그가 성폭행 얘기가 나오자마자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인 것.

    문제가 있다면 응당 '법적 절차'를 밟아 처벌해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그는 '현재 피해 여성 중 한 명은 낙태를 하고, 다른 여성은 임신 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는 취재진의 말에도 "절대 사실이 아니"라며 피해자들을 한순간에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말재주를 부렸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것이며 그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말은 사실상 성추행 혐의의 공소시효가 10년이라는 점을 감안해 내뱉은 계산된 발언이었다. 행위 자체는 부인하지 않지만 성폭행은 아니었다는 변명도 대다수의 성폭력 가해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레퍼토리였다. 결과적으로 이날 이윤택의 기자회견은 사과 표명이 아닌 치졸한 변명을 늘어놓는 자리가 됐다. 문제는 이 자리에 이윤택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던 피해자가 나와 있었다는 점이다.

    배우 김지현은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윤택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모든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자신이 받은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에 그가 자청한 기자회견장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윤택은 전혀 변함이 없었고, 특히 성폭행 부분에서 강제성이 없었다는 말에 그만 기자회견장을 뛰쳐나올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지현은 "자신이 지금 용기를 내지 않아서 이 일이 흐지부지 된다면 지금까지 자신들의 아픔을 힘겹게 꺼내준 피해자들이 또 한번 고통을 당할 것"이라며 연극계가 바로 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오래 전 이윤택에게 당했던 피해 사실을 가감없이 기술했다.

    "저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분들이 증언해 주신것 처럼 황토방이란 곳에서 여자단원들은 밤마다 돌아가며 안마를 했었고 저도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그 수위는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혼자 안마를 할때 전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전 임신을 하였습니다. 제일 친한 선배에게 말씀을 드렸고 조용히 낙태를 했습니다. 낙태 사실을 아신 선생님께선 제게 200만원인가를 건내시며 미안하단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후 얼마간은 절 건드리지 않으셨지만 그 사건이 점점 잊혀져갈때 쯤 선생님께서 또 다시 절 성폭행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아이기에 전 자신의 사람이란 말씀을 하시면서요. 괜찮다. 괜찮다."


    김지현은 "이윤택과의 일 말고는 연희단거리패에서의 생활이 선배들과 후배들과의 관계가 그리고 그곳에서의 공연이 너무 좋고 행복해서 그곳을 나올 수가 없었다"며 "하지만 언젠가부터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고 무대 위에서 관객 앞에 떳떳하게 서 있을 수가 없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고 밝혔다.

    김지현은 "집에 돌아왔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고 지금도 병원에서 공황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면서 "자신이 나온 이후에도 분명 선생님과 피해자만이 아는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후배가 분명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고 밝혀, 전현직 단원들 중에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윤택의 기자회견 직후 나온 김지현의 '미투 고백'은 앞서 디시인사이드에 게재된 '김보리(가명)'의 주장과도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지난 주말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윤택한 패거리를 회상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김보리는 "2005년경 우연히 만난 이윤택으로부터 여자 후배 K가 자신 때문에 낙태까지 했었다는 고백을 들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 다음은 배우 김지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미투 고백' 전문.

    몇일전 이윤택 선생님의 성폭력 사건이 밝혀지면서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연희단거리패에서 있었던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고 치유된줄 알았던 전 다시 심장이 뛰고 옴몸이 뻣뻣하게 저리고 눈물이 났습니다. 페이스북에 제가 아는 사람들의 글이 쏟아졌지만 전 용기가 없어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전 이윤택 선생님의 기자회견장에 갔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모든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것이라고 그래서 제가 받은 상처도 치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에서 갔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선 전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특히 성폭행 부분에서 강제성이 없었다는 말씀에 저는 기자회견장을 뛰쳐나올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연희단거리패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많은분들이 증언해 주신것 처럼 황토방이란 곳에서 여자단원들은 밤마다 돌아가며 안마를 했었고 저도 함께였습니다. 그리고 그 수위는 점점 심해졌고 급기야 혼자 안마를 할때 전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전 임신을 하였습니다. 제일 친한 선배에게 말씀을 드렸고 조용히 낙태를 했습니다. 낙태 사실을 아신 선생님께선 제게 200만원인가를 건내시며 미안하단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후 얼마간은 절 건드리지 않으셨지만 그 사건이 점점 잊혀져갈때 쯤 선생님께서 또 다시 절 성폭행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던 아이기에 전 자신의 사람이란 말씀을 하시면서요. 괜찮다. 괜찮다. 이윤택 선생님과의 일 말고는 연희단거리패에서의 생활이 선배들과 후배들과의 관계가 그리고 그곳에서의 공연이 너무 좋고 행복해서 그곳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었습니다. 무대위에서 관객앞에 떳떳하게 서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조용히 그곳을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왔지만 일상생활이 불가능 했고 병원에서 공황장애 판정을 받았고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연희단거리패에 계신 선배님들께선 아마 이 사실을 모르실겁니다. 그때 용기내서 도와달라고 말씀 못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나온 이후에도 분명 선생님과 피해자만이 아는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후배가 분명 더 있을것이라 확신합니다.

    지금 용기 내지 않아서 이 일이 흐지부지 된다면 지금까지 자신의 아픔을 힘겹게 꺼내준 피해자들이 또 한번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용기를 내는 것이 연극계가 바로 서는 일이고 제가 다시 하늘을 똑바로 볼수 있고 무대 위에서 떳떳한 배우가 될수 있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윤주선배님 죄송합니다. 나중에 만나서 무릎 꿇고 죄송하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진 = 이기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