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의 패배를 대륙 웅비로 풀자"

    A. 대륙낭인(大陸浪人)과 한국

    정한론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서남전쟁(1877)에 참여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그들이 품고 있는 한반도 지배와 대륙웅비의 꿈까지 빼앗아 가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국내에서 받은 패배와 실의를 대륙에 투영하여 그곳에서 ‘웅비의 천지’를 만들어가는 꿈을 키웠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꿈을 키우는데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꿈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실천적 행동으로 대륙을 찾았다. 한반도를 거쳐 만주, 중국, 시베리아, 몽고, 필리핀, 인도까지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그곳에 거점을 만들고, 정치·사회 변화와 그곳의 삶의 양태를 주시했다. 일본 역사는 이들을 가리켜, ‘대륙낭인’이라 부른다. 권력과 금력과 영달을 초개처럼 여기고, 오직 국가의 독립보존과 번영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본의 대륙진출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대륙에서 활동한 민간지사라는 의미다.

    대륙을 오가며 그들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한반도라는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일본이 대륙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로 하여금 대륙진출을 위한 한반도 선점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하다는 ‘정한’의 의지를 더욱 불타게 했다. 이를 위한 첫 작업은 ‘한국의 실상’을 파악하고, 보다 효과적인 활동을 위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서양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은 ‘함포’를 앞세우고 한국의 개국을 요구했다. 힘에 밀린 한국은 1876년 일본에 굴복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면서 대륙낭인의 활동은 국가적 보호 속에서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은 먼저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정찰하면서 정치, 군사, 경제, 사회상을 면밀히 조사하고 기록했다. 물론 그 기록들 가운데는 한국의 문명수준을 의도적으로 ‘야만’으로 만들거나 또는 허무맹랑한 거짓 정보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들은 한국의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혼란스럽고, 국기(國基)는 허약했고, 독립의지는 희박했다. ‘정한’의 실현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가르침 "조선을 일본 세력안에 넣어라"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와 <서울에 남은 꿈[漢城之殘夢]>
    메이지 초기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실정을 가장 소상하고도 비교적 정확하게 남긴 기록은 아마도 <한성지잔몽>이 아닐까 생각된다. 저자 이노우에 가쿠고로(1860~1938)는 1883년부터 4년 동안 오늘의 서울인 한성에 체류하면서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할 수 있는 <한성순보> 발행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한성지잔몽>은 그가 4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정부의 지배계층, 특히 개화파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권력층 내에 친일파를 형성하는데도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노우에가 한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며 문명론자라 할 수 있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교육을 받으면서부터이다. 히로시마(廣島)출신인 이노우에는 게이오(慶應)대학에서 후쿠자와를 만났다. 이노우에의 투철한 국가관[大和魂]을 인정한 후쿠자와는 그를 수제자의 한 사람으로 발탁하여 자신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었다. 두 사람의 사제관계는 마치 ‘군신수어(君臣水魚)’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를 강조했지만, 국권확장론자였다. 그는 “정부의 형태나 실체 모두가 아무리 전제적이라 해도 나라를 강하게 만들 만큼 강력하기만 하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국권확장을 지지했던 인물이다.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을 주장한 후쿠자와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이노우에가 국권확장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대륙웅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국지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1882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이노우에는 후쿠자와의 지시에 따라 12월에 한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의 나의 23세였다.
    한국으로 떠나는 이노우에게 후쿠자와는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인이다’라는 것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훈시와 함께 그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한국이 완전히 독립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의 독립이 어렵지만] 일본 이외에 어떤 나라도 한국에 손을 뻗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을 계도(啓導)하는 것은 오직 일본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이다....최근 중국이 서양 열강에 의하여 분열될 것이라는 논의를 듣고 있다. 결국 중국은 사분오열되어 서양 세력에 빠지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작은 섬나라인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대륙에 발판을 구축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은 위태로울지 모른다. 그 발판 구축의 첫 걸음이 한국을 우리의 세력범위 안에 놓는 일이다." (近藤吉雄, <井上角五郞先生傳>(1943), pp. 35~36)

    이노우에의 사명은 한국을 ‘일본의 세력범위’에 넣고, ‘대륙진출의 가교’를 놓는 것이다.

    박영효-김옥균과 함께 조선으로...한성순보 발행

  • 1883년 23살의 나이에 조선에 와서 '한성순보' 발행을 뒤에서 주도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남긴 서울 체류기 '한성지잔몽'의 표지.
    ▲ 1883년 23살의 나이에 조선에 와서 '한성순보' 발행을 뒤에서 주도했던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남긴 서울 체류기 '한성지잔몽'의 표지.

    이노우에가 한국에 가게 된 직접적 동기는 한국에서의 신문발행이다. 임오군란(1882)의 뒷마무리를 수습하기 위하여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와 김옥균에게 후쿠자와는 한국에서 신문 발행을 권유했다. 게이오 대학과 더불어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여 운영하고 있던 후쿠자와는 ‘백성의 개명’과 ‘국론통합’을 위해서는 신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일본에서 자금을 마련한 박영효와 김옥균은 신문발행의 실무자로 후쿠자와가 추천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대동하고 귀국했다. 그리고 통리아문(統理衙門) 동문학(同文學) 산하에 박문국(博文局)을 두고 1883년 10월 30일부터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한국 최초의 신문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김옥균과 박영효가 추천사를 쓴 <한성지잔몽>은 자신이 한국으로 가게 된 연유, 1883년 당시 한국에서 중국과 일본의 지위, <한성순보>를 발행하기까지의 과정, 갑신정변과 그 후 한국정국의 변화, <한성순보>의 중단과 <한성주보>의 발행, 한국과의 이별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한성지잔몽>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고 있지만, 특별히 눈길이 가는 곳은 그가 본 한국의 지배계급과 그들을 둘러싼 정치현상이다. 그는 대원군, 민비, 양반을 중심으로 한 정권투쟁과 지배계층의 부패현상을 깊숙이 관찰했다. 이노우에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왕족(대원군파)은 척족(민비파)을 꺾으려하고, 반대로 척족은 왕족을 능가하려고 하는 서로의 알력 때문에 정국이 평탄할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양반들은 각각 당파를 만들어 왕족이나 척족과 더불어 세도잡기에 여념이 없다.” 세도가들은 나라와 국민을 염려하기보다 “왕궁을 출입하며 제각기 가문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었다. 정부가 전환국, 화약국, 목축장, 제중원, 영어학교, 광무국 등을 신설할 때도 세도가들은 “이를 핑계 삼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멋대로 국고를 낭비”하고 있었다.
    이노우에가 정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부패와 부조리 그 자체였다. 국민 모두의 삶은 끝없이 피폐해지고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늘어났고, 지방 관리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인구는 감소하고 있었고 고유한 풍속이 점차 파괴되고 있었다. 더하여 교통이 정리되지 않아 천연적 부와 농산물이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
    나라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나라의 자주와 독립, 그리고 백성의 삶을 걱정하는 뜻있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고, 오히려 청국이나 러시아 또는 그 밖의 외국인에게 아부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무리”만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노우에 눈에도 일본의 한국지배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생 불능의 나라 조선..."30대대 군대면 50일안에 먹을 수 있다"

    한국의 지배계층과 사회상에 대한 이노우에의 이와 같은 평가는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이노우에

  • 한국을 돌아본 일본인이 쓴 '이면의 한국' 책 표지. 
    ▲ 한국을 돌아본 일본인이 쓴 '이면의 한국' 책 표지. 

    와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는 <은자의 나라 한국(Hermit Kingdom, 1882)>에서 “한국은 만성적 어려움”에 빠져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 중요한 원인으로 지배계층의 국가의식 결핍과 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나라에는  진정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서 케케묵은 혈족이나 양반사회에 사악함과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매우 절망적인 일이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정부와 관리와의 관계라는 것은 단지 젖과 그것을 빨고 있는 돼지의 관계에 불과했다. 음모와 질투가 끝없이 계획을 방해했다.”
    이노우에보다 조금 뒤에 한국을 돌아본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일본인에 의하면 한국의 군대는, “무뢰한의 무리”로서 “국가를 보호한다는 의지가 없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철포를 버리고 민간인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도망”치고, 돈이 없으면 돈을 빌리기 위하여 “철포를 전당포에 잡히는 것을 조금도 괴이하지 않게 여기는 무리”였다.

    일본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회생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지배층은 백성의 삶은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권력쟁취를 위하여 끊임없이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백성 사이에는 도저히 소통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고, 피지배층은 지배층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현상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정한론자가 “한국은 허약하기 때문에 30개대대의 군대를 파견하면 50일 이내에 정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병탄의 이념적 무기...감명받은 이용구, 아들이름도 '大東國男'으로 지어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한성지잔몽>이 한국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은 한국병탄의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한 일본 역사가의 지적처럼 이 책은 “한국병탄의 이념적 무기”였다.

  • 1893년에 출간된 '대동합방론. 한국합방의 방법론을 제시한 다루이 도키치의 이 책은 당시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을 세뇌시킨 이념의 무기가 되었다. 
    ▲ 1893년에 출간된 '대동합방론. 한국합방의 방법론을 제시한 다루이 도키치의 이 책은 당시 한국과 중국 지식인들을 세뇌시킨 이념의 무기가 되었다. 


    서양으로부터의 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한중일의 ‘대등한 연대’를 강조하고 있는 이 책은 당시 한국이나 중국의 지식인들의 지적 관심을 자극했다. 출판 직후 중국의 개혁론자 량치차오(梁啓超)는 자신의 서문을 추가하여 <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라는 이름으로 상하이(上海)에서 출판했다. 또한 일본의 한국병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대동국의 사내’[大東國男, 오히가시 구니오]라고 지을 정도로 이 책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850년 나라(奈良)에서 태어난 다루이 도키치는 열렬한 정한론자였다. 평소부터 사이고 다카모리를 흠모해 온 다루이는 1877년 서남전쟁이 일어나자 사이고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사이고를 지원하기 위하여 내륙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군사적 봉기는 실패했지만, 그의 ‘정한’ 의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부산과 목포 일대를 몇 차례 내왕한 그는 ‘국면 타개책’으로 한국 근해의 무인도 수색을 착수했다. “나는 평소부터 일본이 무엇보다 먼저 한국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발전의 실마리가 열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 있는 다루이에 의하면 무인도 탐험의 목적은 “정한책(征韓策)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3년 동안의 무인도 탐험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정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는 한편, 대륙낭인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도야마 미츠루(頭山滿)와 함께 상하이에 동양학관 설립을 주도했다. 또한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과 두터운 친교를 맺으면서, 그의 재기를 위한 자금 조달과 후원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오직 일본의 ‘대륙진출’과 ‘정한’의 실현에 귀착했다. 그의 <대동합방론>도 이를 위함이었다.

    "일본+한국=대동국 건설"...한-중 지식인들 겨냥, 한문으로 저술

    <대동합방론>의 초고가 완성된 것은 1885년이지만, 출판된 것은 1893년이다. 8년이라는 공백은 다루이가 두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초고를 분실했기 때문이다. 1893년에 출판된 <대동합방론>의 특색은 초고와 달리 일본어가 아니라 한문으로 써졌다는 점이다. 그가 한문을 택한 것은 처음부터 <대동합방론>의 독자를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이나 중국인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대동합방론>은 서양세력의 아시아 진출이라는 뚜렷한 국제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고 있다. 아시아의 단결과 통합을 위하여 다루이는 구체적으로 세 단계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첫 단계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입장에서 합방하여 ‘대동국(大東國)’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대동국이 중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셋째 단계는 대동국,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섬을 포함한 ‘대아시아연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꾼다면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루이의 주요관심과 <대동합방론>의 핵심 주제는 첫 단계인 대동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대동합방론>의 상당부분은 서양세력의 동양진출로 인한 ‘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쇠잔해 가고 있는 중국의 사정과 호전적인 러시아를 포함한 주변정세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사회적으로 피폐한 한국의 현상을 그렸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은 “이름만 자주국일 뿐 오래전에 자립을 상실”했고, “나라를 부흥시킬 방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가 아닌 나라였다.
    주변사정을 볼 때 그동안 한국이 의존해온 중국은 “한국을 후원할 실력을 이미 상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한번 러시아에 의존하게 되면 “두 번 다시 나라를 일으키기 어렵고 동양의 폴란드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외적 상황에서 한국이 택할 길은 일본과 통합하는 이외의 다른 길이 없었다. 동종동문(同種同文)의 형제와 같은 일본의 보호와 지도를 받을 때 한국은 비로소 자주성을 확립하고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택해야 할 길은 명확해졌다.
    다루이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의 ‘합방’은 대단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그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한국 침략으로 한국 내에 반일감정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한 가족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우리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의 지형은 입술과 이와 같고, 그 세력은 수레바퀴의 두 바퀴의 관계이고, 그 정은 형제와 같으며, 그 의리는 벗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방국의 국호를 ‘대동’이라고 함은 ‘동(東)’이라는 글자가 예로부터 한국과 일본이 함께 사용한 또 다른 국호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루이는 이처럼 친근하고 대등한 합방을 논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길목의 한국, 합방국의 주권자로서의 일본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루이가 살펴 본 세계정세에 의하면 강대국들은 “속국(屬國)을 본토 면적의 몇 십 배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단 하나의 속국도 거느리지 못하고”있었다. 구미의 여러 나라와 대등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일본도 그 영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키워야만 했다. 결국 일본이 진출해야 할 곳은 ‘대륙’이고, 대륙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반도가 필요했다. 다루이는 “일한합동이 이루어진다면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포함한 대륙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1870년대 정한론자의 논리와 다를 바 없었다.

    결국 한반도는 일본이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징검다리’이고, 대등한 ‘합방’이라는 명분은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일본이 이 후 진행한 대륙정책은 <대동합방론>의 코스를 밟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동합방론>은 한국병탄의 ‘교본’이었고, 대륙정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